매일신문

[엄원태의 시와 함께] 쇄빙선 / 안도현

하체를 땅에 묻고 사는 사내가 있다

마치 북극바다의 얼음을 가르면서 앞으로 나가는 쇄빙선 같다

왜 아랫도리를 보여주지 않을까, 궁금하였으나 한번도 땅에서 몸을 빼내 보여준 적 없다

허리 밑 전체가 땅에 꽂혀 있는 그를 물푸레나무라고 불러야 할까

독야청청 걸어가는 그의 가지 끝에 고무줄구름 이쑤시개구름 머리핀구름이 흔들린다 할까

그는 땅을 양쪽으로 가르며 시장바닥을 헤쳐가고 있다

두 팔을 휘두르며 물속에 잠긴 몸을 움직이는 것처럼 장거리 수영선수처럼

비천한 세상을 천천히 끌고 다니는 사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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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우리나라 최초의 쇄빙선 '아라온호'의 성공적인 남극 시험운행 소식을 기억하는지. 극지의 두꺼운 얼음을 깨고 묵묵히 제 갈 길을 개척해가는 쇄빙선의 이미지는, 자연스레 일찍이 전인미답 극지를 탐험해 간 아문센이나 스콧 같은 불굴의 사내들을 떠올리게 한다.

시인은 시장바닥에서 종종 보게 되는 앉은뱅이 고무줄장수 사내에게서 바로 그 쇄빙선을 떠올리고 있다. "그는 땅을 양쪽으로 가르며 시장바닥을 헤쳐가고 있"는 것이다. 몸뚱어리란 "천천히 끌고 다녀야" 하는 비천하고 치욕스런 짐일 테지만, 오히려 그는 몸을 이끌어 두꺼운 얼음덩어리에 다름없을 시장바닥을 헤치며 항해해 나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독야청청" 얼어붙은 대지를 가르며 극한의 세상을 가고 가는 한 척의 고집스런 쇄빙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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