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6월 대한민국 국민의 '주름'을 책임질 막중한 임무를 진 한 중년 신사가 있다. 웃음도 울음도 그의 손에 달렸다. 바로 허정무(55)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이다. 두 달 뒤 2010 남아프리카 월드컵에서 '태극 전사'를 진두지휘하며 한 달 동안 우리를 '행복지경'으로 인도한다. 누구보다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한국 대표팀의 선장 허정무 감독을 지난달 29일 대한축구협회에서 만났다.
-월드컵이 코앞에 다가와 많이 바쁠 것 같다.
▶최종 엔트리 구성을 위해서 국내 프로축구 경기를 보러 다니며 선수들을 점검하고 밤낮없이 상대팀 경기 비디오를 분석한다. 또 밤 시간대나 주말엔 영국 프리미어리그, 프랑스 리그 등을 보며 해외파 선수들의 몸 상태나 기량도 확인한다. 이러다 보니 밤낮이 자주 바뀌어 애를 먹기도 한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선수,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트레이너, 1994년 미국 월드컵 수석 코치에 이어 이번 남아공 월드컵엔 감독으로 월드컵에 네 번째 참가한다. 감회가 어떤가. 또 다른 점은.
▶선수로 월드컵에 네 번째 출전하는 이운재가 있긴 하지만 선수와 코치진 자격으로 4번의 월드컵에 참가한 경우는 처음으로 안다. 앞선 세 번의 월드컵은 아쉬움과 후회가 컸다. 상대팀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었고, 그저 막연하고 두려웠다. 위축되고 주눅들어 기량을 제대로 발휘하지도 못했다. '이렇게 했었으면' 하는 아쉬움과 결과에 대한 후회가 막심했다. 그러나 이번엔 다르다. 스스로 '최선을 다했느냐'고 물었을 때 '그렇다'고 답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할 것이다. 선수로 출전했을 땐 막연히 시키는 것만 하면 됐지만 감독은 선수 전체를 이끄는 선장으로 팀 전체를 책임져야 해 선수 때와는 부담감이 전혀 다르다.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이 두 번째다. 이전 경험이 도움됐나.
▶1998년 10월부터 2년간 대표팀 감독을 맡았을 땐 선수와의 관계, 선수 지도 등 모든 것이 어려웠고 미숙했다. 프로를 거친 뒤 다시 지휘봉을 잡으니 훨씬 낫다. 당시의 시행착오와 경험이 지금 큰 도움이 된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야 한다는 것도 그때 배웠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때 와일드카드로 선택한 홍명보가 나이지리아와의 마지막 평가전에서 다쳐 결국 올림픽에서 뛰지 못했다. 경미한 부상으로 판단, 데리고 갔는데 경기 직전 도저히 뛸 상황이 아니어서 부랴부랴 강철 선수로 바꿨지만 시차 적응, 준비 시간 부족 등으로 첫 경기(스페인)에 패했고, 이후 2승을 했지만 골득실차로 결국 탈락했다. 감독으로서 판단 착오를 했다.
-'토종 감독'으로 좋은 성적을 내야 한다는 부담이 있지 않나.
▶국내 감독, 외국 감독이라는 이원화된 인식을 버려야 한다. 외국 감독이든 국내 감독이든 언제나 그 당시 상황에 필요한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다. 적합한 감독을 선임해 우리나라 축구 발전을 이루는 게 중요하다. '토종 감독'으로서 부담이 있는 건 사실이다. 다른 게 아니라 혹시라도 '역시 국내 감독은 안 된다'는 말이 돌아 다른 국내 감독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다. 그리고 성적에 대한 부담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있다.
-조별 예선 상대팀의 전력과 가장 힘든 상대는.
▶특별히 부담스러운 팀도, 부담스럽지 않은 팀도 없다. 다시 말해 세 팀 다 힘든 상대이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르헨티나는 세계 톱 클래스 선수들로 구성돼 있어 개인 기술이 뛰어난데다 남미 축구답지 않게 빠르기까지 해 우승 후보로 손색이 없다. 나이지리아는 체력, 체격 조건이 좋지만 조직력이 다소 허술하다. 최근 감독이 바뀌었기 때문에 팀 색깔도 바뀔 것으로 보여 시간을 두고 그에 맞춰 대응할 생각이다. 그리스 역시 신장과 체력이 좋고 수비가 튼튼한 팀이다. 선수들의 개인 기술이 유럽에서 톱 클래스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떨어지지도 않는다. 그리스의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이 13위다. 무시하거나 만만하게 볼 팀이 아니다. 그리스를 무조건 잡아야 하는 팀으로 거론하는데 이는 위험한 발상이다. 그런 팀은 없다. 상대가 누구든 매경기 사력을 다하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최근 엄청난 득점력을 보이고 있는 메시에 대한 대책은 있나.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당시 허 감독이 마라도나를 전담한 것처럼 메시에게도 전담맨을 붙일 생각인가.
▶메시는 한 사람이 잡을 수 있는 선수가 아니다. 그리고 아르헨티나에 메시만 있는 것도 아니다. 프리미어리그의 테베스와 프리메라리가의 이과인도 메시 못지 않은 세계 최고의 공격수다. 메시만 막는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팀대 팀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고, 최대한 상대 스피드를 죽이고 메시 등에게 공이 가지 않도록 팀 전체가 협력·압박 수비를 하는 게 중요하다. 멕시코대회 땐 마라도나만 막으면 됐지만 지금은 아니다. 전담맨 문제나 상대팀 대응 방법 등 구체적인 전술적인 얘기는 하지 않는 게 좋겠다.
-마라도나 감독의 자질에 대해 논란이 많다. 심지어 마라도나가 감독으로 있기 때문에 아르헨티나전 선전을 점치는 사람이 많은데 어떻게 생각하나.
▶결코 만만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경험 없는 감독이 대표팀을 맡으면 매스컴 등 주위에서 가만히 두지 않는다.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시비도 건다. 마라도나의 경우 다혈질이고 발끈하는 성격이어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이는 일시적인 현상이다. 내공은 쌓이기 마련이기 때문에 절대 그 모습 그대로 남아공으로 가진 않는다. 아르헨티나 경기에서 마라도나 감독 덕을 본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 게 좋다.
-이번 월드컵의 목표는
▶월드컵 원정 16강 진출이다. 16강이 있어야 8강도, 4강도 있다. 그러나 결코 쉽지 않다. 험난하지만 감독, 코치진, 선수 모두 '해낼 수 있다. 반드시 해내자'는 각오가 대단하다. 지금은 예전처럼 월드컵이라고 주눅들지 않는다. 모두 마음껏 자기 기량을 최대한 발휘한다는 분위기다.
-월드컵을 두 달여 앞둔 현재 대표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뭔가.
▶팀 전체를 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공격수·미드필더·수비수·골키퍼까지 전체가 다 강해져야지 부분이 강해선 월드컵에서 통하지 않는다. 축구는 1대1이 아니라 11대11 경기다. 전체가 묶여야 한다. 또 예전처럼 두려움, 주눅 등으로 제 기량을 발휘 못하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승부를 즐길 수 있는 팀, 경기장에서 마음껏 모든 걸 쏟아붓고 나올 수 있는 팀을 만들 것이다. 90분 동안 열심히 뛴다고 해서 최선을 다한 것은 아니다. 준비와 분석까지 열심히 해야 한다. 철저히 준비할 것이다.
-이번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G세대들의 활약이 빛났다. 축구대표팀에도 G세대의 힘을 기대해도 되나.
▶대표팀에도 이청용, 기성용 등 G세대가 적잖다. G세대의 키워드는 '즐긴다'로 알고 있다. 그러나 즐긴다는 말을 잘 알아야 한다. 막연히 즐긴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경기력은 물론 정신적으로도 잘 준비한 뒤 즐겨야 한다. 승부를 즐기려면 상대를 압도해야 가능하다. 상대가 마음대로 못하게 하고 우리 페이스대로 끌고 가야 즐길 수 있다. 마냥 즐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노력, 상대에 대한 연구 등 준비와 여유, 자신감 등 마음가짐 그 자체가 즐거움이 돼야 한다.
-대구 출신 스트라이커 박주영의 '천재성'에 대한 논란이 많았다. 박주영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것으로 아는데, 축구 천재라 생각하나.
▶스타는 누구나 열심히 하면 될 수 있지만 슈퍼스타는 천재성이 있어야 한다. 박주영은 분명히 천재성이 있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청구고 시절 속초에서 열린 추계연맹전에서 보고 감각이 뛰어나고 영리하다는 걸 알았다. 이후 대학을 거쳐 프로로 진출하면서 기대대로 성장했다. 그러나 프로 2년차부터 한동안 힘든 시기를 보냈고, 대표팀에서도 침체기를 거치면서 '박주영은 이제 끝났다'는 등 회의론이 일었다. 그때 나는 비판들을 일축했다. 다시 천재성을 발휘할 시기가 온다고 확신했다. 스타는 누구나 성장 과정에 고비가 있고 침체기를 거친다. 이를 딛고 일어서야 진정한 슈퍼스타가 된다. 논란이 있을 때도 박주영을 꾸준히 불렀고 기회를 줬다. 시간 날 때마다 "네가 거쳐야 할 단계다. 이 과정에서 많은 걸 배웠으면 좋겠다"고 충고했고, 이제는 더 이상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을 정도의 선수가 됐다. 앞으로 더 훌륭한 선수로 성장할 것을 확신한다.
-국내 최초 스포츠-연예 스타 커플이다. 1970년대를 주름잡았던 미녀 스타MC였던 최미나씨와 결혼한 지 올해로 딱 30주년이다. 월드컵이 열리고 대표팀 감독으로 출사표를 던진 뜻 깊은 해다. 예감이 어떤가.
▶예감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가정이 편안해야 모든 일이 잘 되기 때문에 항상 행복하게, 모나지 않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아내에게 고맙게 생각한다. 좋은 성적을 거둬 즐거운 마음으로 30주년을 기념할 수 있도록 하겠다. 꼭 목표를 이뤄 대한민국 축구 발전을 위해 열심히 응원해주는 팬과 국민께 최고의 선물을 선사하고 싶다.
이호준기자 hoper@msnet.co.kr
사진·프리랜서 장기훈 zkhaniel@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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