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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암칼럼] '숫자의 볼모'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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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저께 어느 퇴역 장군과 점심 자리를 가질 기회가 있었다. 85세라는 노(老) 장군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소위 시절에 직속 대대장을 지냈다고 했다. 목소리가 워낙 쩌렁쩌렁해서 '젊은 현역 시절에는 목소리가 굉장했겠습니다'고 묻자 '여의도 광장에서 맹호부대 출정식 할 때도 마이크 없이 구령을 불렀다'고 했다.

대화 중에 핸드폰이 울렸다. 장군이 폴더를 열고 문자 메시지를 들여다본다. 물론 안경을 쓰지 않고서다. 건강 비결이 뭐냐고 묻자 대답이 '젊게 살아서'였다. 그래서 이왕이면 팔팔하게 살려고 8자(字)를 즐겨 쓴다며 명함을 보라고 하셨다. 재미난 휴대폰 번호가 눈에 들어왔다. 01×-××××-8888 8자가 나란히 4번이다. 이번엔 e-mail 주소를 봤다. k××88888888@yahoo.×.×. 온통 8자뿐이다 그것도 8번. 8자를 즐겨한다는 13억 중국 사람 중에도 e-mail에 8자를 8번 연속 붙인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 같다.

요즘 사람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는 날까지 숫자에 옭매여 사는 세상을 만들어 놓고 있다. 2.5㎏이니 3㎏이니 몸무게 숫자로부터 출생기록이 시작돼 심장 박동 수, 혈압 수치를 재면서 죽음을 카운트 다운하는 순간까지 온통 숫자 속에 묶여 산다. 아침 기상 시간은 물론이고 출근 시각에 맞춰 자동차 시동을 걸고, 열차나 지하철의 몇 시 몇 분 차를 맞춰 타야 한다. 길에서는 시속 70㎞, 100㎞ 제한 숫자에 맞춰 운전을 조절해야 하고 횡단보도를 건널 때는 깜박이는 숫자의 남은 숫자에 맞춰 뛰거나 걸어야 한다.

목욕탕에서는 체중계의 바늘 숫자에 따라 먹는 것까지 가려가며 산다. 옷을 살 때도 팔 길이, 허리둘레 숫자를 외우고 다녀야 하고 비밀번호나 계좌번호를 못 외우면 제 돈도 제 맘대로 쓰기 힘든 세상을 만들었다. 시집, 장가가는 데도 키가 몇 ㎝냐는 숫자 놀음이 오간다. 심지어 IQ 수치처럼 양(量)뿐 아니라 질(質)의 세계에까지 숫자를 끌어와 스스로 속박시킨다. 대학 순위, 도시 순위도 숫자를 매겨놓고 예산 대접을 다르게 한다.

하루 24시간을 살면서 숫자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생각하고 움직일 수 있는 여유가 얼마나 될지 생각해보면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숫자로 꽁꽁 동여맨 듯한 세상이 된 거다. 어릴 때 손가락셈을 배우기 시작한 순간부터 숫자의 틀 안에 갇혀, 죽는 날까지 숫자에 의해 계산되고 비교되고 평가되는 숫자의 볼모가 되고 있는 셈이다.

계량화되고 첨단화돼 가는 세상을 살면서 숫자의 볼모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그러나 '숫자의 미신'에까지 빠져드는 건 문제가 된다. 흔히 유럽호텔에 13호실이 드문 것이나 동양의 병원 병실, 엘리베이터, 건물 등에 4호나 4층을 쓰지 않으려는 통념 같은 것이 그런 예다. 합리의 극치인 수(數)의 세계에서 숫자에 대한 미신적인 기피 심리나 기호 심리가 끼어든다는 건 약간은 재미난 현상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생각 나름이다.

13일의 금요일을 싫어한다는 미국도 미국을 상징하는 미합중국 대문장(大紋章) 속에는 독수리가 든 화살이 13개, 구름 수가 13개, 표어 숫자 13, 좌익 날개 13개, 우익 날개 13개, 꼬리털 13개…. 다 합치면 13이란 숫자가 13번 되풀이해 들어있다. 독일의 카를 4세 황제는 거꾸로 자기 이름 속의 4자를 기려 철저하게 4자로만 살았다. 하루 4번 식사하고 의복도 4색, 4개 국어를 배우고 4번의 결혼을 하고 식사는 4코스에 4가지 술을 마셨다. 군대도 4개 사단에 4명의 장군, 4명의 함장을 임명했다. 죽을 때(1398년)도 새벽 4시 4분에 '잘 있거라 !'는 유언을 4번 되풀이한 뒤 숨을 거뒀다고 했다.

일화(逸話)이긴 하지만 인간은 무언가(숫자)를 만들고는 그 속에 갇혀 볼모가 되고 다시 그 무언가에 의미를 붙여 매달린다. 요즘 정치판에서 권력을 창출하고도 다시 그 권력의 볼모가 돼 무너지는 모습 또한 숫자의 볼모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김정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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