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을 겪고 난 뒤 지역 화단에 많은 변화가 왔다. 전란에 뒤따른 사람들의 이동과 그 와중에 이루어진 피란 작가들과의 교류가 영향을 미쳤겠지만 무엇보다 사회변동으로부터의 충격이 저마다 내부에서 변화를 모색하려는 노력들을 자극해 어떤 새로움을 추구하려는 현상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1950년대의 대구화단은 표현주의와 추상, 신구상 등 다양한 양식의 폭넓은 스펙트럼을 갖추게 되었다.
당시 작품들의 추이를 살피게 되면, 긴장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비정형의 격렬하게 동요하는 이 작품의 이미지처럼 마치 전후 서구미술의 노정을 밟아가듯 정신적이고 내적인 세계의 표현을 추구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어떤 재현적인 모티프도 찾을 수 없고 표현의 모든 구속과 제한으로부터 벗어나 완전히 자유로운 순수한 평면의 추상작품에 이른 것을 보면 실로 감동적이기도 하다. 근대에 이어 현대에 와서도 대구미술에서 진보적인 조형의식들이 어떻게 선취되고 있는지 새삼 놀라게 된다.
장석수가 남긴 '흑암을 등진 방안에서'라는 글을 보면 당시 이런 야심 찬 시도들이 자신과 벌인 고뇌에 찬 투쟁의 결과였음을 알려준다. 55년 무렵부터 진행되어온 그 자신의 추상화의 단계가 58년 6월로 서명된 이 작품 '사정'(射程)에서 본격적인 비대상회화로 전환된 것인데 열정적이고 단호한 미학적 태도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작품의 시각적 인상은 잭슨 폴록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뿌리기 같은 행위의 흔적이 닮아 보임에도 불구하고 두터운 물감의 질료를 느끼게 하는 부분에서 둘 사이의 차이는 아주 커 보인다. 또 화면의 가장자리를 여백으로 남기면서 사각면의 경계를 의식하고 배려한 점이 캔버스를 전면적으로 사용하여 화면 밖으로까지 확산시키는 폴록의 자세와 많이 다르다. 주로 정신성이나 내면의 무의식을 이끌어 내는 수단으로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법과 연관을 맺고 있는 폴록의 드리핑 기법이 그래도 주요하게 적용되고 있지만 화면 곳곳을 지배하는 물감의 마티에르 효과가 유럽 앵포르멜 작가들의 작업과 더 가깝다. 이것은 그가 단순히 특정 작가를 모방하거나 기교만을 채택하지 않았고 유럽과 미국의 회화를 불문하고 내적 충동과 우연성에 의존한 비구상미술의 성격을 충분히 이해했다는 방증이다.
정신적이면서 또 역동적인 강렬한 표현은 물감의 중첩과 흐름, 심하게 다룬 재료의 표면 효과를 통해 그 느낌이 더욱 역력하게 전달된다. 이러한 양식은 서구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유에 대한 새로운 의식의 매우 급진적인 실천방식이었을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짐작하기 어렵겠지만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시도였다. 이 작품은 1958년 제2회 조선일보 현대작가미술전에 초대 출품되었다.
김영동(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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