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정태의 중국책읽기] 中國傳世經典叢書 '백가성(百家姓)'/遠方出版社, 2006

중국 504개 성씨의 기원·계통 정리

14억 명이 사는 중국에는 과연 성씨가 몇 가지나 될까? 1971년 대만에서 출간된 '중국성씨집'은 중국에 존재하는 성씨가 약 5천600여 개라 한다. 당나라 시기에 1천400개, 남송 시기 2천600개였던 사실을 고려하면 중국의 성씨는 역사 이래 꾸준히 늘어났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근래 발간된 '백가성'(원방출판사, 2006)을 보면 중국인의 약 90%가 포함되는 성씨는 실제 504개이고, 나머지 성씨들은 수가 줄거나 사용하지 않아 유야무야한 상태라고 한다. 성(姓)은 원래 혈통의 표기방법이다. 인류사회의 초기 단계였던 원시 모계사회에서는 공동생산, 공동분배의 사회였기 때문에 사유재산은 물론이고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알지 못했다. 사회발전과정에서 결혼제도가 생겨났지만 여전히 어머니만 확인 가능할 뿐 아버지를 확인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종국적으로는 일부일처나 일부다처제도가 생겨났지만 그 전에는 자연스럽게 모계 중심의 부락이 유지될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서는 근친번식을 피하기 위해 같은 부락 사람들과 결혼하지 않는(同姓不通婚) 관습이 생겼고, 자연스럽게 부락단위로 구분되는 성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중국의 아주 오래된 성씨인 희(姬) 강(姜) 등에 모두 '女' 부수가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렇게 형성된 모계중심의 성 사회는 사회발전과정에서 부계 씨(氏)중심사회로 대체된다. 남자의 생리상 특징이 부락의 통치권을 장악하고 확대되면서 모계사회에서 부락단위를 구분하던 성 대신에 권력의 유무에 따라 귀천을 표시하는 씨 제도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당시 씨는 통치계급만이 가지던 전유물이었기 때문에 노예는 물론이고 일반 평민들도 씨를 가질 권리가 없었다. 중국 한족 성씨의 시조 대부분이 제왕장상(帝王將相)인 것은 그 때문이다.

오늘날처럼 성과 씨가 구분이 없어지고 수가 많아지게 된 것은 주나라 시기와 춘추전국 시기의 혼란을 거치면서이다. 봉건제를 택한 주나라는 봉토를 나누듯 성씨도 나누었다. 예를 들어 무왕이 55개 제후국에 하사한 희(姬)씨 성은 후에 198개로 분화된다. 동일혈통인 왕(王)씨 역시 상(商)족의 왕씨, 주(周)족의 왕씨, 서역(西域)의 왕씨로 분화되었다. 춘추전국 시기의 사회혼란 역시 성씨 양산의 원인이다. 왕후장상이 하루아침에 평민으로 전락하거나 평민이 벼락부자가 되면서 성씨를 구매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현재 중국 성씨의 80% 이상이 춘추전국 시기에 형성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중국이 56개의 민족으로 구성되어 분열요소가 많을 것이라는 이야기나 인구의 95% 이상이 한족이어서 동질성이 강하다는 말들 모두 별 의미가 없을 듯싶다. 대신 '백가성'에 기재된 504개의 성씨 내력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가장 많은 성씨 중의 하나인 김(金)은 '백가성'에 기재된 성씨 중 서열 69위에 해당하고, 황제(黃帝)의 일족이었다고 적고 있기 때문이다.

경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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