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출신의 토머스 듀버네이(Thomas Duvernay'50) 영남대 교양학부 교수는 한국인보다 더 한국적인 사람이다. 한국 여성과 결혼해 20년 넘게 한국에 살고 있는 그는 국궁에 관한 책을 펴낼 만큼 한국 문화에 박학하다. 파란 눈의 이방인이지만 한국사도 공부해 영남대 국제학부에서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주제로 강의도 하고 있다. 특히 그는 신미양요(1871년 미국 군함이 강화도를 침입한 사건) 때 미국에 빼앗긴 '어재연 장수기'(조선군을 지휘하다 전사한 어재연 장군이 사용한 군기)의 반환을 이끌어 낸 일등 공신이다.
한국 문화를 즐기고 한국 역사 공부에 푹 빠진 그를 보면 국적이나 피부색보다 어디에 거주하며 무엇을 하고 있느냐가 사람의 정체성을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또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알리는 데 청춘을 바친 그의 인생 행적은 우리 것의 소중함을 잊고 사는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만든다.
◆첫 경험이 인생 항로를 바꾸다
듀버네이 교수가 한국 땅을 처음 밟은 것은 1984년이다. 원대한 계획이 있어 한국을 찾은 것이 아니라 이국적인 생활을 경험해 보겠다는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때 교환학생으로 그리스에서 잠시 생활을 했는데 낯선 문화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혈기 왕성한 23살이었기 때문에 약간의 모험심을 안고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그는 경주 문화고등학교에서 영어 원어민 교사로 1년을 근무한 뒤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가 한국에 거주한 기간은 1년으로 짧았지만 인생에서 차지하는 의미는 남달랐다. 경주 문화고등학교에서 과학을 가르치던 여교사와 사랑에 빠져 결혼에 골인하면서 인생 항로 자체를 바꾸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선생으로 재직할 때 아내는 가장 가깝게 지낸 친구였습니다. 미국으로 돌아간 뒤 펜팔을 통해 사랑을 키웠습니다. 결혼을 하고 아들을 낳은 뒤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생활을 하다 1989년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들어왔습니다."
◆국궁 전문가에서 신미양요 전문가가 된 사연
듀버네이 교수는 서구 열강이 한반도를 침탈하던 조선후기 역사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다. 특히 미국과 한국이 충돌한 신미양요에 대한 애정은 남다르다. 신미양요에 대한 그의 관심은 국궁에서 비롯됐다. 한국으로 생활 터전을 옮긴 뒤 한국 배우는 일에 심취한 듀버네이 교수는 1993년 우연한 기회에 접하게 된 국궁에 매료돼 2004년 캘리포니아국제문화대학(Intercultural Institute of California)에서 국궁을 주제로 석사 학위까지 받았다.
국궁 공부를 하면서 그는 '한국군이 마지막으로 국궁을 사용한 시기는 언제일까'라는 의문을 자신에게 던진 뒤 이에 대한 물음을 찾기 위해 관련 서적을 뒤지다 신미양요가 발생한 사실을 알게 됐다. "신미양요 때 국궁을 사용하지 않았을까 궁금해서 신미양요에 대해 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쉽게도 신미양요 당시 조선군은 국궁 대신 조총을 무기로 사용했습니다. 국궁은 갑오경장이 일어날 때까지 조선군 훈련용으로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듀버네이 교수는 현재 영남대에서 역사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마지막 논문만 남겨 놓고 있는 상태. 논문 주제는 당연히 신미양요와 관련된 것이다. "신미양요 당시 조선군과 미군이 사용한 화약 무기를 비교사적으로 접근해 논문을 쓸 계획입니다." 그는 논문 준비를 위해 신미양요 당시 격전지였던 강화도를 수시로 찾고 있다. 지난해 가을에는 신미양요 때 미군이 사용했던 탄환도 발견했다. "아직도 강화도 곳곳에서 유물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5년만 지나면 상당수가 소실될 것입니다. 역사가 사라지기 전에 전면 재조사가 필요합니다." 한국인도 잘 모르는 역사적 사실을 줄줄 말하고 유물이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워 전면 재조사가 필요하다는 문구를 인터뷰 기사에 넣어 달라고 부탁하는 그를 보면 한국 역사에 대한 사랑을 짐작할 수 있다.
◆136년 만에 고국 품에 안긴 '어재연 장수기'
1871년 미군에게 빼앗긴 '어재연 장수기'가 2007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병인양요(1866년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입한 사건) 때 프랑스군에 빼앗긴 각궁을 프랑스 소장자로부터 구입해 육군사관학교에 기증한(2002년) 전력을 가진 듀버네이 교수의 역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듀버네이 교수가 '어재연 장수기'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1995년이다. 신미양요 공부를 위해 미국에 보관돼 있던 신미양요 관련 보고서와 사진을 보다 '帥'(수)자가 적힌 깃발에 관심이 꽂혔다. 그는 미국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깃발이 보관돼 있는 사실을 알고 당시 대통령이었던 빌 클린턴을 비롯해 의회 의원들에게 반환을 요청하는 편지를 수차례 보냈다. "어재연 장수기는 미 해군의 용기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아래서 장렬하게 전사한 조선 병사들의 용기를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한국 정부는 1970년대 초 장수기 존재를 확인하고 반환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한 뒤 거의 손을 놓고 있었다. 듀버네이 교수의 용기 있는 행동에 문화재청도 반환 요구에 가세했다. 하지만 미국의 대답은 한결같이 부정적이었다. 장수기를 돌려주면 세계 각국으로부터 전리품 반환 요구가 밀려들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듀버네이 교수는 완전 반환은 어렵다고 판단해 문화재청에 장기 대여하는 방안을 권고했다. 밀고 당기는 줄다리기 끝에 최장 10년 임대 조건으로 '어재연 장수기'는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추후 재협상이 잘 마무리돼 장수기가 영원히 한국에 돌아오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완전 반환이 쉽지는 않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2차대전 당시 미국은 일본의 아오지마섬을 점령했다 반환한 적이 있습니다. 섬도 돌려받는데 깃발 하나 돌려받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완전 반환이 어렵다면 영구 임대를 해서라도 계속 한국에 남겨 두어야 합니다."
◆"민간이 주도하면 문화재 반환 한결 쉬워져"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게 약탈되었던 외규장각 도서가 영구 임대 방식으로 한국으로 돌아온다. 구한말 열강의 침탈을 자주 받았던 역사 탓에 한국은 많은 문화재를 수탈당했다. 반환받아야 할 문화재는 많지만 반환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이에 대해 듀버네이 교수는 "문화재를 반환받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법을 개정하거나 국회의 동의를 얻어야 문화재를 돌려줄 수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무런 대가 없이 선뜻 문화재를 돌려줄 리도 만무합니다. 반환 목적으로 협상을 제안하면 거절당하기 십상입니다. 정부는 끊임없이 빼앗긴 문화재를 대가 없이 돌려 달라고 주장을 펴고 실제 협상은 민간이 해야 합니다. 박물관 대 박물관이 장기 임대 계약을 맺는 방식으로 실질적 반환을 이끌어 내는 전략이 필요합니다. 또 대다수 국민들은 박물관에 소장된 외국 유물이 어떤 경로를 통해 들어왔는지 모릅니다. 꾸준한 홍보를 통해 사실을 널리 알려 여론을 환기시키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는 또 "미국 렉싱턴에 있는 트랜실베이니아대학 박물관에는 신미양요 때 미군이 가져간 유물이 많이 전시돼 있었는데 1960년대 홍수로 상당수 유실되었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유물 가운데 반환 가능한 것이 불랑기포(유럽과 중국을 거쳐 한국에 들어온 대포)입니다. 불랑기포를 가져갔던 미군 장교의 후손들 일부가 반환에 찬성하고 있습니다"고 덧붙였다.
◆조선왕조실록 자주 탐독
듀버네이 교수는 웬만한 한자는 모두 읽을 수 있을 정도로 한자에도 밝다. 한국 역사를 공부하기 위해서는 한자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조선왕조실록을 자주 본다고 했다. 신미양요에 대한 기록을 찾기 위해 조선왕조실록을 처음 접한 뒤 읽는 재미가 쏠쏠해 자주 읽게 되었다는 것. "처음 조선왕조실록을 볼 때 한자사전을 옆에 두고 일일이 찾아가며 한자를 익혔습니다. 쓰는 것은 자신이 없지만 읽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합니다. 한국 역사는 세계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을 만큼 매력적입니다. 한국인들이 너무 당연시 여겨 매력을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그는 영남대 국제학부에서 한국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 영어로 진행되는 수업은 주로 토론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는 "한국인뿐 아니라 한국에 살고 있는 외국인도 한국 역사를 배워야 합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의 역사를 아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흔히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합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역사는 꼭 배워야 합니다. 역사로부터 배우는 교훈이 많기 때문에 미국을 비롯해 많은 나라들이 자국 역사를 교과 과정에서 필수과목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며 최근 한국 교과 과정에서 역사가 필수과목에서 제외된 사실에 다소 의아해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듀버네이 교수에게 한국이 갖는 의미를 물었다. "태어나는 것은 의지대로 되지 않지만 어디에서 살 것인가는 자신이 결정할 수 있습니다. 미국은 주어진 조국이고 한국은 제가 삶의 터전으로 삼은 곳입니다." 미국을 '홈 컨츄리'(home country), 한국을 '홈'(home)이라 부른 그는 미국에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가르치는 교육 기관을 설립해 한국을 널리 알리는 일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그의 부인은 이미 영남대에서 한국사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두 사람의 한국사 지식이 만나면 한국을 알리는 민간 외교관으로 손색이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경달기자 sarang@msnet.co.kr 사진 성일권기자 sungi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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