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종욱의 박정희 이야기] (34)박정희 전 대통령의 리더십(상)

박정희 전 대통령의 리더십을 제대로 평가해 보자. 터무니없이 과대평가되거나 형편없이 폄하된 리더십을 냉철하게 들여다보고, 미래의 한국을 건설하는 데 교훈으로 삼아보자. 실패한 것은 타산지석으로 삼고, 성공한 것은 일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교훈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최초 경제공약은 기아에 허덕이는 민생고를 해결하는 것과 자주경제에 맞춰져 있었다. 바로 박정희 경제 리더십의 출발점이다. 민생고를 해결하고, 자주경제를 확립할 수만 있다면 리더십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정당성을 부여받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1961년 한국의 1인당 소득은 89달러로 세계 125개국 가운데 101번째로 최빈국 그룹에 속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보릿고개의 후유증이 남아 있었고, 조금 완화된 것은 미국의 원조 덕택이었다. 반면 북한은 320달러로 세계 50위에 들 정도로 잘 살았다.

1962년 1월 13일,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발표되었으나 뒷감당이 문제였다. 국가재정이 바닥나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해외에서 자금을 한 푼도 끌어올 수 없었다. 대부분의 재정을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는 나라,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가 어디에서 돈을 꾸어올 수 있었겠는가?

거창한 계획을 발표하기는 했으나, 초반부터 핵심이라고 발표한 제철소 건설 같은 중공업 위주의 계획은 대부분 폐기되었다. 다만 화학공업과 경공업 같은 일부 분야만 예정대로 추진되었다. 들어오는 돈은 없고 나가기만 했기 때문에 1963년 9월에는 외환보유고가 1억달러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 같은 와중에서 경제개발을 계속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은 서독의 차관 덕분이었다. 정부 재정에 단물이 되기도 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었다는 사실이다. 서독의 차관 확보가 경제혁명의 진정한 출발점이 되었다.

1961년 11월, 정래혁(鄭來赫) 전 상공부장관이 이끈 한국 대표단은 본에서 서독정부와 협상을 벌인 끝에 1억5천만마르크의 차관을 제공받기로 합의했다. 담보를 제공할 수 없었던 한국 정부는 극심한 노동력 부족에 시달리던 서독에 인력을 수출하고, 그들의 월급을 3년간 독일 코메르츠방크에 강제 예치하는 방법으로 지불보증을 했다. 사실 이 상황은 쉽게 납득할 수 없다. 그러나 파독 간호사의 대부라 일컫는 이수길 박사가 2006년 11월 6일, 한국 언론과의 회견에서 '차관 자체는 이미 민주당 시절에 협상을 한 부분'이라는 증언이 그 같은 의문을 말끔히 풀어주었다.

이를 다시 정리해 보면 이렇다. 서독 차관은 이미 민주당 정권 때부터 협상이 이루어진 현안이었다. 차관 1억5천만마르크 가운데 상업 차관에 대해서는 지급보증이 필요했다. 당초 알려진 대로 박정희 정부에서 먼저 광부와 간호사 안을 내놓은 것이 아니라, 독일 측이 제안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한'독 양국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것이었다.

한국에서 광부를 모집하기 시작했다. 당시 국내에서는 먹고살기조차 힘들었던 때라 대학 졸업자들도 상당수 지원했다. 힘든 일을 전혀 해보지 않은 지원자들은 고운 손이 결격 사유가 될까 봐 연탄에다 손을 비벼 일부러 거칠게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광부 1진 123명이 독일에 도착한 때가 1963년 12월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7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을 때 '고속도로를 건설하겠다'는 공약을 내놓았다. 다들 비웃었다.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이 그 대열의 앞장에 섰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 국도나 지방도의 대부분이 포장되지 않았던 시절이다. "국민소득이 겨우 100달러를 넘어선 나라가 무슨 고속도로를 건설한다고?" "차도 몇 대 안 되는 나라에 무슨 고속도로야?"하면서 비아냥거렸다. 그런 가운데 박정희는 고속도로 건설을 밀어붙였다. 그 뒤 세월이 한참 지나자, 모두들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자신이 생각한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또한 그의 결심은 도중에 바뀌거나 흐지부지 되는 일이 없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토록 강한 집념을 불러일으키게 했을까? 그것은 바로 가난이라는 숙명에 대한 반발심이었다. 그래서 '잘살아 보자'며 국민들의 마음을 한데 그러모았다. 가난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정치인'으로 만든 원동력이자, 리더십의 처음이요 끝이었다.

문화사랑방 허허재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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