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웃사랑] 뇌병변 앓는 아버지 돌보는 백소현 씨

"내 미래가 어찌되든 아빠가 먼저 일어나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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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나 왔어요.\" 소현(가명'25) 씨는 매일 아빠에게 말을 건다. 막걸리 제조공장 두 곳을 운영하며 사장님 소리를 듣던 백정훈(가명'59'뇌병변 1급) 씨는 딸의 외침을 들을 수 없다. 정운철기자 woon@msnet.co.kr

아버지는 '술'에 인생을 걸었다. 막걸리를 좋아했던 아버지는 40년 가까이 술을 빚고 또 술을 팔았다. 막걸리 제조공장 두 곳을 운영하며 사장님 소리를 들었던 백정훈(가명'59'뇌병변 1급) 씨는 남에게 손 벌리지 않고 삶을 꾸려왔다. 건강한 몸과 자존심으로 버텨온 인생이었다. 그랬던 그가 뇌출혈로 쓰러진 뒤 몸을 가눌 수 없는 신세가 됐고 4년째 25살 된 딸에게 삶을 의지하고 있다.

◆막걸리 공장 '백 사장'

11일 오후 대구의 한 다세대 주택 골목. '××막걸리'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대리점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막걸리 상자 대신 가정용 소파가 놓여 있었다. "어서 오세요. 여기가 저희 오빠 집이에요." 백 씨의 여동생 미선(가명'54) 씨가 대신 인사를 했다. 한때 막걸리를 판매했던 이곳은 가정집으로 변했다. 서울에 사는 미선 씨는 틈틈이 대구로 내려와 오빠를 돌본다. 가게 안쪽 33㎡ 남짓한 단칸방에서 백 씨와 딸 소현(가명'25) 씨가 함께 지낸다. 백 씨는 군대에서 막걸리와 연을 맺었다. 강원도 철원에서 군 복무를 하는 오빠를 위해 미선 씨는 면회를 갈 때마다 '한일탁주'를 사갔다. "오빠가 막걸리를 아주 좋아했어요. 제대하자마자 막걸리 파는 일부터 하더라고요." 1970년대는 막걸리 수요가 많았던 시절이었다. 백 씨는 막걸리 공장에서 일을 배우다가 도매업을 시작했고 1992년 마침내 제조 공장을 차렸다. 20년 만에 어렵게 이룬 꿈이었다. 백 씨는 전북 군산과 경기도 포천에 공장 두 개를 차렸다. '물 좋은 곳에서 술을 빚어야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업계에서 술을 잘 빚는다는 소문이 나자 찾아오는 수습생들도 생겼다. 하지만 IMF가 터지면서 자금난으로 공장 두 곳이 차례로 넘어갔다.

그 무렵 아내와 갈라서는 이혼의 아픔까지 겹쳤다. 그래도 그는 다시 일어섰다. 술 제조공장 대신 공장에서 막걸리를 가져와 소매점에 판매하는 대리점 두 곳을 서울과 대구에 각각 열었다. 그렇게 한고비 넘겼다고 생각했을 때 일이 터졌다. 2008년 2월 19일 딸과 함께 대구 대리점에 수금을 하러 간 백 씨가 뇌출혈로 쓰러진 것이다.

◆ 무너진 희망

식구들은 백 씨가 금방 일어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중환자실만 벗어나면 되겠지' '1년만 지나면 되겠지' 하는 바람이 벌써 4년째 이어지고 있다. 병과 함께 막걸리 대리점 사업도 끝이 났다. 병원비도 감당하기 힘든 상황에 밀린 돈을 달라며 독촉하는 이들이 집으로 찾아왔다. "쓰러지고 나니까 돈 준다고 찾아오는 사람은 한 명도 없고 돈 받을 사람들만 집으로 몰려왔어요."

미선 씨가 백 씨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눈물을 머금었다. 현재 백 씨는 숨 쉬는 것 외엔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영양분은 위에 연결된 관으로 잘게 간 음식을 넣어 하루 세 번씩 흡수한다. 뇌동맥이 터져 뇌실에 물이 차는 수두증까지 생겼고 몸에 연결된 호스가 장을 뚫고 항문으로 나와 수술을 받기도 했다. 간호는 오롯이 딸 소현 씨의 몫이었다. 2008년 당시 서울 한 사립대 통번역학과 3학년이었던 그는 아빠가 쓰러진 뒤 학교를 그만뒀다. '공부보다 아빠가 먼저'라는 생각에서였다. 소현씨는 아빠의 기침 소리가 커지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아버지의 가슴을 두드린다.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가래가 기도(氣道)로 넘어가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빠는 일어날 거예요"

고모 미선 씨는 꿈 많았던 조카가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 못내 안타까웠다. "남자친구를 사귀는 게 어떠냐고 하니까 '애인 생기면 아빠한테 소홀해진다'며 단번에 거절하더라고요. 소현이는 연애 한 번 제대로 못 했어요." 미현 씨는 이런 조카를 대신해 오빠를 간호하려고 서울에서 대구까지 300㎞가 넘는 거리를 일주일에 여러 차례 오간다.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인 백 씨에게 하루 4시간씩 무료 간병인 서비스가 지원되지만 24시간 돌봐야 하는 탓에 미선 씨가 대구로 올 수밖에 없다.

고모의 배려 덕분에 소현 씨는 일을 구했다. 약 2년 전부터 엘리베이터 회사 경리 일을 구해 100만원 남짓한 월급을 손에 쥔다. 여기에 정부 지원금 40여만원을 보태 매달 22만원씩 방세를 내고, 대출 이자와 아빠 병원비까지 감당해야 한다.

몸 안 장기가 제 구실을 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백 씨는 1년에 네댓 번 병원에 간다. 비급여 검사가 많아서 갈 때마다 병원비가 수백만원 청구된다. 소현 씨는 은행 대출이 불가능하자 인터넷 광고를 보고 대출 신청을 했다. 신분증과 개인정보까지 모두 넘기고 대출 신청을 했지만 업체는 "대출 자격이 안 된다"며 거절했다.

하지만 이들은 소현 씨의 개인 정보를 악용해 휴대전화를 개통하고 소액 결제방식으로 100만원이 넘는 돈을 사용했다. 급한 마음에 잡은 지푸라기가 화로 돌아온 것이다.

이들 집에는 소현 씨가 고등학교 때 풀었던 문제집부터 백 씨가 건강할 때 입었던 옷까지 모든 짐이 그대로 놓여 있다. 소현 씨는 아버지와 자신의 짐을 함부로 버리지 못했다. 이 모든 짐들이 아빠와 함께 살아온 흔적이 담긴 삶의 부스러기라고 생각해서다.

"아빠 나 왔어요." 소현 씨는 아빠가 언젠가 자신의 외침을 알아듣고 "어서 와"하고 웃어줄 날이 올 것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고 있다. 황수영기자 swimmi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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