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인들의 경기 참관기] 8) 박미영 시인의 밤의 경기장에서

환호와 탄식…보석처럼 빛난 대구 사람들

밤의 경기장은 눈부셨다. 대구스타디움은 황홀한 보석상자처럼 빛났고, 선수들과 관중들의 얼굴엔 열정과 환희가 가득했다. 이렇게 품위 있고 멋진 시민들이라니! 창던지기와 높이뛰기 그리고 세단뛰기가 필드에서 펼쳐질 때 선수들의 동작 하나 하나에 온 관중들은 환호하고 낮게 탄식했다. 트랙에서 선수들이 달리기와 허들, 장애물 경기 출발을 준비하면 색동머리 살비가 전광판에 나와 '쉬잇!' 손가락을 입에 가져갔고 관중들은 숨소리마저 멈췄다. 세계 유수의 어느 골프 갤러리들이 이보다 세련되고 아름다울까. 그야말로 보석처럼 빛나는 사람들로 가득 채워진 밤의 경기장이었다.

세 시간 남짓 진행된 그날 일정 내내 경기장 한쪽에선 시상식이 열렸고, '미녀새' 이신바예바 대신 새로운 히로인이 된 무레르 등에 대한 시상과 각국의 국가가 울려 퍼졌다. 관중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영광스러울 그 나라의 국가에 경의를 표했고 선수에겐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대회가 종반으로 치닫고 있는 시기라 잦은 시상식이 개최되었지만 관중들은 전혀 귀찮아하는 기색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함께 기뻐했다. 그러면서 트랙에서 가장 뒤처져 달리는 선수에게도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밤은 깊어갔지만 3,000m 장애물 경기에서 우승한 케냐의 켐보이가 트랙을 돌며 기쁨의 춤을 출 때, 관중들은 모두 어깨를 덩실거리며 함께 즐거워했다. 그에 고무되었던지 수줍음이 많은 듯한 높이뛰기 우승자 제시 윌리엄스도 상기된 모습으로 성조기를 몸에 두르고 트랙을 돌았다. 누군가 먼 중앙 필드에서 날아오르는 흰 창이 그리는 포물선을 망원경으로 바라보며 환호성을 질렀고, 트랙을 달리는 선수들이 가까워지는 관중석마다 도미노처럼 환호가 터졌다.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나는 순간 시(詩)가 어떻게 오는 것인지 어렴풋이 깨달았다. 아니, 이 아름답고 싱그러운 필드와 트랙 그리고 보석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 고대로부터 인류에게 면면히 전해오는 제의(祭儀)를 깨달았다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일까, 고대 희랍의 육상경기장이나 로마의 콜로세움 그리고 베를린올림픽경기장과 대구스타디움에서의 인류의 순수와 열정이 게놈지도처럼 시공을 뛰어넘어 한데 묶여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류는 하나다!

사실 경기장에 오기 전 나는 매일신문에서 발행한 202개 참가국 명단을 꺼내 되뇌어보았다. 5대륙별로 구분한 국기와 국명, 수도, 인구수, 선수수, 임원수가 자세히 기재된 지면이라 미리 챙겨둔 것이었다. 아시아, 아메리카,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유럽, 재미있는 시를 읽듯 한 나라씩 짚어가다가 동티모르, 방글라데시, 시리아,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아이티, 르완다, 소말리아, 시에라리온, 보츠와나, 에디오피아 등의 이름에서 자꾸 목소리가 결리는 걸 스스로 느끼게 되었다.

그 느낌은 월계수로 일장기를 가린 고(故) 손기정 선수와 맨발의 아베베 그리고 라면과 왜소한 몸집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임춘애 선수를 다른 지면에서 대할 때와 같은 것이었는데, 대부분 소수의 선수와 임원들이 이번 대회에 참석하고 있는 그들의 나라가 지난 세기말부터 최근까지 내전(內戰)을 비롯한 전쟁과 자연재해로 큰 고통을 받거나 겪고 있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손기정과 아베베, 임춘애가 최선을 다해 달리고 또 달렸던 것처럼 온힘을 다해 경기에 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자신들의 영광을 모두 힘든 조국에 바치고 있었다. 그 곁에서 나도 인생에서 그리 쉽게 찾아오지 않을 것 같은 뜨거운 순간을 그날 밤 아름다운 밤의 경기장에서 함께 누렸다.

시인'작가콜로퀴엄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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