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인들의 경기 참관기] 9·끝) 우광훈 소설가가 본 우사인 볼트의 200m

'번개' 볼트보다 재빠른 관중

이 글을 쓰기 위해 내가 얻은 초대권은 2장. 문제는 내가 두 딸의 아버지란 사실이다. 큰딸 다은이를 데리고 갈 것인가, 작은 딸 진서를 데리고 갈 것인가. 암표 구입까지도 고려한 숙고 끝에 결국 작은 딸을 버리기로 했다. 아내가 엄숙한 목소리로 결과를 발표하자, 작은 딸은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나도 우사인 볼트 보고 싶단 말이야!"

대구스타디움으로 향하는 버스 안은 온통 우사인 볼트에 관한 이야기뿐이다. 특히 우사인 볼트의 신발 이야기는 단연 압권이다. "글쎄, 경북여고 2학년 학생이 우사인 볼트가 던진 신발을 받았다지 뭐야. 걔 완전 횡재한 거야, 횡재." 순간, 큰딸이 기다렸다는 듯 묻는다. "아빠, 우사인 볼트 신발 경매 부치면 얼마 받을 수 있을까?" 나 역시 나에게 묻는다. 오늘도 신발을 던질까? 던진다면 어느 쪽으로 던질까? 내가 어디쯤 앉아야 그 신발을 받을 수 있을까? 그건 아마 신발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오후 9시 17분. 여자 100m 허들경기가 끝나자 드디어 우사인 볼트가 운동장에 등장한다. 잠시 뒤, 경기장 아나운서가 3번 레인인 우사인 볼트를 소개하자, 모든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른다. 순간, 다른 경기에선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긴장감이 흐른다. 하지만 나의 머릿속엔 잠시 사악한 기운이 농담처럼 스쳐지나간다. '오늘 한 번 더 파울하면 그건 정말 대박인데….'

출발 총성이 울리자, 선수들이 일제히 스타팅 블록을 박차고 뛰어나간다. 10초 정도 지나자, 승부는 완전히 볼트 쪽으로 기운다. 순간, '라이트닝 볼트'(Lightning Bolt)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번개 볼트, 솔직히 저 정도면 번개는 아니다. 그럼 치타 볼트? 이건 치타가 웃고 갈 소리다(치타는 100m를 3초에 주파한다). 그냥 빠르다? 잘 달린다? 순간, 벚꽃이 떨어진다. 초속 5㎝. 볼트가 그 속도의 아름다움을 이해할 수 있을까?

볼트가 결승선을 통과하자, 우레와 같은 환호와 박수가 쏟아진다. 볼트가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번개 포즈를 취한다. 그리고 자메이카 국기를 들고 운동장을 돌기 시작한다. 차츰, 내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운동장을 서둘러 빠져나갈 것인가? 아니면 볼트를 좀 더 지켜 볼 것인가?

후자를 선택한 게 뼈아픈 실수였다. 휴대폰 속에 담긴 볼트의 사진은 그 형태조차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다. 포커스는 빗나갔고, 심도는 흐려 마치 유화물감을 아무렇게나 문질러 놓은 듯하다. 우린 아쉬움을 뒤로하고 출입문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이런, 관람석이 벌써 반 이상 비어 있다.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관중들.

볼트보다 더 빠른 관중들 때문에 마음이 조급해진다. 예상했던 대로 셔틀버스를 기다리는 줄은 그 끝을 찾아 볼 수 없다. 우린 결국 시지 이마트까지 걷기로 한다. '그런데 관람기는 언제 쓰지?'. 밤을 꼬박 새워야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 하지만 바람이 시원하다. 아, 가을이다.

이글을 쓰고 있는 현재 시각은 새벽 0시 27분 36초. 실시간 검색어 순위는 다음과 같다. 1위 셔플댄스, 2위 이예린, 3위 야래향, 4위 이민선, 5위 정지이, 6위 그것이 알고 싶다, 7위 빽가, 8위 신지, 9위 로또 457회 당첨번호, 10위 박영린. 좀 전만하더라도 순위를 싹쓸이하던 '200m 결승', '우사인 볼트', '200m 세계신기록'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다. 사람들의 관심이 너무 빨리, 그리고 너무 쉽게 변하는 것 같아 걱정이다. 이런 걱정을 이 시간에 하는 걸 보면 나는 영락없는 소설가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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