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웃사랑] 구강암 남편 돌보는 중국인 아내 주염홍 씨

언어 장벽 넘겨준 종이와 펜, 癌 이기는 교통 수단

남편 황인수(49) 씨는 이제 말이 없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눈빛 혹은 글로 표현한다. 혀와 턱으로 암세포가 퍼져 말을 할 수 없게 된 황 씨는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아내와 아들을 위해서라도 힘을 내야만 한다. 우태욱기자 woo@msnet.co.kr
남편 황인수(49) 씨는 이제 말이 없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눈빛 혹은 글로 표현한다. 혀와 턱으로 암세포가 퍼져 말을 할 수 없게 된 황 씨는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아내와 아들을 위해서라도 힘을 내야만 한다. 우태욱기자 woo@msnet.co.kr

중국인 주염홍(37'여) 씨는 한자를 멋있게 썼던 남편 황인수(49) 씨의 필체에 반했다. 중국어가 서툰 남편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한자를 적었다. 연애 시절 남편이 종이와 펜을 꼭 가지고 다녔던 것도 언어의 장벽을 넘기 위해서였다. 결혼 8년차, 이제 눈빛만 봐도 통하는 부부 사이가 됐지만 남편은 다시 노트에 글을 적기 시작했다. 지난달 혀와 턱 주변에 생긴 암세포를 제거한 뒤 말을 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국경을 넘은 사랑

염홍 씨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99년 가을이었다. 당시 염홍 씨는 중국 다롄(大連)에 있는 미용실에서 헤어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었다. 어설픈 중국어를 구사하던 한국 남자는 머리카락만 자르고 금세 사라졌다. 그리고 2주 뒤 머리카락이 채 자라지도 않았는데 다시 미용실에 나타났다. 이렇게 다섯 번쯤 미용실을 이용한 남자가 염홍 씨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다. 염홍 씨는 호기심으로 데이트를 허락했다. 자기보다 12살이나 많은 외국인이 무슨 배짱으로 데이트를 신청했는지가 궁금했다. 하지만 만남을 거듭할수록 남자에게 빠져들었다. 중국에서 고추와 참기름, 콩을 가져가 한국에서 파는 일을 했던 남자는 '보따리상'이었다. 부지런히 일하고, 열심히 구애하는 그가 맘에 들었고 2004년 결혼을 결심했다. 하지만 염홍 씨 가족은 결혼을 반대했다. 가족들은 "12살이나 많은 외국인이 뭐가 좋다고 고향을 버리고 떠나야 하느냐"고 설득했다.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했지만 아버지는 결국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빠진 결혼식은 조촐했고 하객은 10명이 전부였다. 염홍 씨는 그해 '남편'이 된 남자와 한국으로 왔다.

◆희망을 덮친 절망

2007년 부부는 아들을 얻었다. 아들의 이름은 황자병(黃子炳). 남편은 '빛나는 아들이 되라'며 이렇게 이름을 지었다. 자병이는 부부의 새 희망이 됐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지난해 12월 남편은 "혀가 이상하다"며 심한 통증을 호소했다. 대학병원에서 조직검사를 받아보니 혀 밑에 악성 종양이 생겼고'편평세포암종'(구강암)이라는 진단 결과가 나왔다. 의료진은 "혀에서 아래턱뼈까지 암세포가 번져 전혀 손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설명했다. 암을 방치하면 임파선과 폐로 전이돼 생명을 앗아갈 수 있다고 했다. 남편은 올해 1월부터 3월까지 40차례에 걸쳐 종양을 제거하는 방사선 치료를 받았다. 음식을 삼키지 못해 힘들어하는 남편을 위해 염홍 씨는 매일 아침 죽을 만들었다. 75㎏이던 남편의 체중은 세 달 만에 20㎏이 줄었다.

암세포는 끈덕지게 남편을 괴롭혔다. 지난달 암이 재발해 다시 병원에 입원했고 남편은 턱뼈를 잘라내고 종양을 제거한 뒤 오른쪽 다리에 있는 근육과 뼈를 이식하는 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수술 부위가 썩는 바람에 이식한 피부를 제거하는 등 남편은 3차례나 수술대에 누워야 했다. 수술 후유증으로 말을 할 수 없게 된 남편은 한동안 천장만 바라봤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링거핀을 꽂은 채 병원을 뛰쳐나갔다. 가족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조차 할 수 없었던 남편이 아내와 병원에 알리지도 않고 집으로 가버린 것이다. "자기 한 명 때문에 가족들이 고생한다고 생각해서 굉장히 힘들었나 봐요. 제가 겨우 설득해서 병원으로 데리고 왔어요." 염홍 씨가 남편의 손을 꼭 잡았다.

◆"한국을 떠날 수 없어요"

18일 오후 병원에서 만난 황 씨는 오른손에 펜을 꼭 쥐고 있었다. 남편의 병 때문에 이들 부부는 연애 시절처럼 필문필답으로 소통하고 있다. 세 식구의 원래 보금자리는 월세 30만원짜리 원룸이지만 염홍 씨는 다섯 살 난 아들 자병이를 혼자 집에 둘 수 없어 병원에 데리고 왔다. 엄마와 아들은 병실에 있는 간이 침대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잔다. 또 다른 문제는 병원비다.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라서 의료비 감면 혜택을 많이 받지만 그래도 내야 할 병원비가 700만원이 넘는다. 월세를 내는 것도 벅찬 형편에 병원비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그는 눈앞이 캄캄하다. 황 씨 가정을 돕고 있는 달서구 다문화가족지원센터 박선미 사회복지사는 "염홍 씨가 헌신적으로 남편과 아이를 돌보느라 본인 식사도 제때 못하고 있다"며 "염홍 씨는 올해 5월 한국 국적을 얻을 수 있는 통지서를 받았지만 부산중국영사관까지 갈 시간이 없어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염홍 씨에게 지금 한국 국적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남편의 건강이고, 가족이다. 이제 그가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남편을 짓누르는 암세포와 맞서 싸워야 한다. 황수영기자 swimming@msnet.co.kr

※이웃사랑 계좌는 '069-05-024143-008(대구은행), 700039-02-532604(우체국) ㈜매일신문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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