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그룹 회장 고 정주영은 전설 같은 인물이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이끌고 간 불세출의 영웅이다. 요즘 들어 천재로 떠받들고 있는 스티브 잡스를 앞서는 뛰어난 귀재다. 용감하기로는 이순신 장군에 견줄만하며 풍류로 따져도 옛날 시색주(詩色酒)에 파묻혀 놀던 한량들에 비겨도 전혀 모자람이 없다.
정주영은 모든 일을 직관으로 처리했을 뿐 오래 생각하거나 저울질하지 않았다. 그의 모토는 '빨리빨리'였다. 삼성이 일을 시작하기 전에 100매의 보고서를 꾸민다면 현대는 단 1매로 끝을 내고 바로 현장으로 달려간다. 심사숙고형과 기분파의 장단점이 있기 마련이지만 그는 항상 물속에 뛰어 들고 나서 헤엄을 배우는 식이었다.
정주영은 열여덟 살 때 누이 시집보낼 돈을 훔쳐 네 번째 가출했다. 인천 부두에서 하역 일을 하면서 잠을 못 자게 한 빈대에게서 한소식을 얻는다. 그것은 불가에서 흔히 말하는 깨침의 경지였다. 인부들은 빈대의 습격을 피해 물 담은 양재기를 상다리에 끼우고 그 위에서 잤다. 그러나 빈대는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 냈다. 벽을 타고 천장으로 기어 올라가 가장 맛있는 살갗 부근으로 다이빙하여 피를 빠는 방식이었다. "옳다. 바로 이것이구나. 하찮은 미물도 먹이를 얻기 위해선 온갖 지혜를 다 짜내는데 사람이 못 할 일이 어디 있으랴."
그는 1973년 석유파동 때 중동에 일거리가 많은데도 우리 기업들은 '사막은 덥고 물이 없어 공사를 못 한다'며 뒷짐만 지고 있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요청으로 중동을 다녀온 그는 이렇게 말했다. "1년 내내 비가 오지 않으니 공사하기 좋지요. 자갈과 모래는 현장에 있고 물은 실어오면 되지요. 근로자들은 낮엔 천막에서 자고 밤에 일하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정주영의 빈대철학이다. 중동에서 공사가 시작되자 30만 명이 일터로 달려갔으며 보잉 747기가 달러를 싣고 들어왔다.
정주영은 "어렵습니다"라고 말하는 부하 직원에겐 "이봐, 해봤어"라고 윽박질렀다. 그는 조선업을 하기로 결심하고 돈을 빌리러 영국으로 날아갔다. 영국에 도착한 그는 바로 옥스퍼드대 캠퍼스에 들어가 10분 정도 산책한 후 버클레이은행으로 갔다. 은행장에게 자신을 소개하면서 옥스퍼드대 경제학 박사라고 능청을 떨었다.
"조선에 관한 논문을 냈더니 2시간 만에 박사학위를 줍디다." 정주영은 호주머니에서 500원짜리 지폐에 그려져 있는 거북선 그림을 보여주며 "한국은 영국보다 앞서 철갑선을 만든 조선의 종주국이다"고 우겨 결국 차관 도입에 성공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빈대철학으로 이뤄낸 업적은 수없이 많다. "한국산 자동차를 만들지 말라"는 스나이더 주한 미국 대사의 협박을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자동차 현대'를 일궈냈다. 그리고 소 501마리를 싣고 휴전선을 넘었으며 서해 방조제 물막이 공사 때는 유조선을 끌고 와 거센 물살을 막아 일을 끝낸 아이디어맨이다.
그의 철학을 몇 가지로 요약하면 고정관념을 버리고 역발상으로 도전하라, 의지를 갖고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세상에 불가능은 없다, 해 보고 안 된다고 말하자 등이다.
정주영의 풍류는 아무도 따라 올 수 없는 경지에 가 있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정주영의 여자들'에 관해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들은 영웅호걸들이 하나같이 저지르는 저지레에 불과하다. '남자의 허리 아래 얘기는 하는 것이 아니라'는 프랑스 속담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는 이북이 고향으로 막국수를 좋아했다. 점심시간에 맞춰 계동 현대 본사 사옥에서 헬리콥터가 뜨면 강원도 양양의 실로암막국수집(033-671-5547)으로 날아간다. 시원한 동치미 국물에 만 메밀국수를 먹고 나선 "값은 싼데 맛은 최고야"라고 한 마디하고선 서울로 돌아간다. 그는 한 그릇에 5천~6천원이던 국수 값만 따질 뿐 헬리콥터의 비용은 계산에 넣지 않았다. 이만한 풍류가 어디 있을까.
이번 초겨울 동해 여행에 나서 첫날 점심을 실로암막국수로 때웠다. 마침 앉다 보니 정주영 회장이 자주 앉았던 바로 그 자리였다. 우린 헬기가 없어 자동차로 4시간을 달려왔다. 그 맛이나 이 맛이나, 막국수 맛이었다.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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