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지상 백일장] 동지팥죽/그 한 음/동방박사/엄마는 거짓말쟁이

♥수필1-동지팥죽

동지가 다가오면 우리 집에서는 찰벼를 우케로 말려 디딜방아로 찧는다. 어머니께서는 찹쌀 반 말을 찬물에 담근다. 이것을 빻아 떡가루를 만든다. 할머니께서는 어머니를 도와주신다. 그날은 가족의 나이 수대로 새알을 빚어서 할머니와 어머니는 팥죽을 서말지 무쇠 솥에 가득 끓인다. 나는 잔심부름을 하며 거든다. 정성을 들여 끓인 팥죽을 할머니께서는 신줏단지 앞에 차려 놓으시고 꿇어앉아 손을 비벼가며 주문을 외우듯 빈다. "새해에는 만복이 깃들고 악귀는 썩 물러가거라. 일 년 건강 무사태평하기를 축원드립니다" 하고는 절을 하신다. 나는 할머니의 말씀에 따라 절을 두 번 한다. 이렇게 하고 나서 곳간이나 장독대에 팥죽을 떠다 놓으신다. 집안 곳곳에 솔잎을 뿌리시며 "악귀야 썩 물러가거라" 하신다.

사촌들과 함께 삼대가 할아버지를 중심으로 호롱불을 가운데 두고 둘러앉아 함께 먹는 팥죽 맛은 최고다. 그날 눈 내린 벌판, 하늘에는 으스름달이 온 세상을 비춘다. 큰집 작은집 할 것 없이 팥죽을 가져다 드린다. 서로들 오간다. 팥죽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인정, 우애를 나누는 것이다.

60년이 지난 오늘, 아이들은 팥죽이 어떤 것인지도 무슨 뜻으로 먹는지도 모른다. 배고픈 시절 먹었던 팥죽은 만병통치약이었다. 그 시절이 그리워 이맘때면 고향을 자주 간다. 디딜방아는 아무 말 없이 홀로 집을 지키고 있다. 올해도 팥죽을 먹으며 옛날을 그리워한다.

박효준(대구 달서구 송현2동)

♥수필2-그 한 음

이달 초에 어느 행사에 참석한 적이 있다. 지정된 곳에 앉아야 했는데, 내 자리는 맨 앞이었다. 식이 시작되자, 여러 명사들의 지루한 소개와 축사가 이어졌다. 이제나 끝나려나 싶을 즈음, 뜬금없이 앙상블 공연을 하겠단다. 해당 시에서 지원하는 문화사업의 일환인 듯했는데, 말 그대로 볼품이 없었다. 쇼팽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항의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되는 소리들. 세련된 명연주들에 길든 내 귀에는, 잠시만 들어도 돌아서고 싶을 만큼 엉성한 연주였다.

나는 이내 흥미를 잃고 무심한 눈길이 되었다. 마침 앞에 앉은 터라, 연주자들의 표정과 몸짓이 세세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들이 제 음을 틀리는 순간에 꿈틀, 움직이던 살아있는 표정. 그럼에도 상대의 소리를 듣기 위해 귀를 기울이는 모습, 그리고 더는 틀리지 않기 위해 온 마음을 집중하는 안간힘. 그런 것들을 보고 있자니 문득, 왠지 모르게 참 인간적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그들의 소리가 갑자기 알 수 없는 감동으로 밀려와, 내 속이 파도처럼 격하게 일렁이는 것이다. 비록 불협화음에 가깝기는 했지만 단 하나의 소리를 내기 위해 애쓰던 사람들. 간신히, 겨우, 들어맞던 그 한 음(音). 그런 것들이 내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말없이 눈물을 훔치는데, 옆 사람이 지겨워 죽겠다는 듯이 하품을 했다. 순간, 그이가 정상이란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났다. 그랬다. 나는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연주를 듣고, 말도 안 되는 눈물을 흘린 것이다. 하지만, 그 말도 안 되는 감동이야말로 살아있는 음악만이 줄 수 있는 진정한 무엇은 아니었을까.

해마다 이맘때면 온 세상이 음악으로 휘청거린다. 최신가요가, 성탄 캐럴이 우리의 마음을 들뜨게 한다. 그러나 그 많은 곡조들로 우리가 노래하려는 것은 무엇일까. 아등바등 사느라 듣지 못했을 내면의 소리, 소중한 이들과 함께 연주해왔을 일상의 음악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싶은 연말이다.

이지후(대구 수성구 범어1동)

♥수필3-동방박사

무수한 별들이 빛나는 페르시아의 밤하늘, 유난히 밝은 별 하나를 보고 동방에서 박사들이 따라나섰다. "참 이상한 별이야. 저렇게 찬란하게 빛나고 또 움직이는 별은 처음이야." 박사들은 귀한 이의 탄생을 알기라도 하듯 황금과 유황과 몰약을 준비해 별을 따라 길을 재촉한다. 동방박사 세 사람은 페르시아의 점성가로 조로아스터교의 예언자 마고이(magoi)들이었다. 바빌로니아의 유프라테스, 티그리스 두 강을 건너 헬몬산과 골란고원을 넘어 요단강을 끼고 게넷사렛 호수를 건너 서남쪽으로 내려갔다. 멀리 유대 땅 베들레헴이 있음 직한 곳으로 별은 계속 움직인다.

때는 온 천하가 다 호적령이 내려져 오가는 사람들로 길은 붐비고 여인숙에 유할 곳도 없는 분주한 세상이다. 별은 베들레헴 어느 마구간 위에 멈추었고 목동들의 피리 소리가 청량하게 들렸다. 아기 예수는 왕의 왕으로 탄생하였다. 호위한 천군천사들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합창한다.

동방의 박사들은 엎드려 절하고 경배하며 황금과 유황과 몰약을 바치고 자기 갈 길을 서둘러 떠났다.

2천 년 전, 아기 예수의 탄생을 알리던 베들레헴의 별은 아직도 빛나는데 별의 움직임을 알아보는 동방박사는 보이지 않는다.

백종철(경남 창녕군 고암면)

♥시1-엄마는 거짓말쟁이

엄마, 산타할아버지 언제 와?

아이가 잠잘 때 온단다.

그럼 뭐 타고 와?

응, 사슴이 끄는 썰매를 타고 온단다.

그럼 커다란 양말을 현관에 걸어 두어야지.

아냐, 산타할아버지는 굴뚝으로 들어오는 거야.

산타할아버지는 우는 아이에게 선물 안 주지?

그럼, 웃는 아이, 착한 아이에게 선물을 준단다.

어느덧, 아들은 여섯 살이 되었다.

아들아, 이번 크리스마스엔 산타할아버지가 어떤 선물 주실까?

산타할아버지는 가짜야. 엄마가 선물 사줬잖아.

아냐, 산타할아버지 썰매 타고 오실 거야.

자동차가 쌩쌩 달리는데 사슴이 어떻게 썰매를 끌어? 눈도 안 왔는데.

아냐, 산타할아버지가 썰매 타고 굴뚝으로 들어와 선물 놓고 가셨어.

우리 집에는 연기 나는 굴뚝이 없잖아?

옥상에 굴뚝 있어, 한번 올라가 볼래?

그럼 아궁이는 어디 있어?

(……)

엄마는 거짓말쟁이.

그동안 엄마에게 속았다는 아들도

그동안 아들에게 거짓말쟁이였던 엄마도

하하 웃으며

크리스마스 선물 사러 마트로 간다.

신나게.

조순미(대구 달서구 신당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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