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아카시아 꽃

아득한 옛날처럼 느껴지겠지만, 사실 40~50년 전만해도 보릿고개가 있었다. 동네 뒷산의 칠부 능선 쯤을 오를 때면 가지마다 주렁주렁 하얀 간식 봉지를 달고 찾아오는 꽃이 있었으니 바로 아카시아 꽃이다.

아카시아는 봄날 허기를 달래주던 붕어빵 같은 꽃이며 특별하게 놀 것이 없었던 어린 시절 다양한 놀이를 제공해주던 자연장난감 놀이도구이기도 했다.

책보를 어깨에 둘러매고 친구들과 함께 오가던 학굣길에서 아카시아 잎을 따 가위바위보 놀이를 통해 이기는 사람이 잎 하나씩 따내기를 했다. 먼저 잎을 따낸 사람의 책보를 대신 들어주는 놀이다. 게임에 져서 책보 하나는 어깨에, 또 다른 하나는 허리에 매고 빈 도시락 딸깍거리며 뛰다보면 어느새 마을 입구에 도착해 있었다.

머슴애들은 책 보따리를 마루에 팽개쳐 놓고 꼴망태 메고 들판의 아카시아 나무 밑에 다시 모여 들었다. 아카시아 잎을 손가락으로 튕겨서 잎을 많이 떨어뜨리는 게임을 해 진 사람은 꼴을 한 뭉치씩 베어다 바치는 것이다. 이 놀이에서 늘 지는 아이는 덜 찬 꼴망태를 메고 터덜터덜 집으로 들어가 부모님께 꾸지람을 듣곤 했다.

여자애들은 아카시아 파마 놀이를 했다. 소꿉놀이를 하다가 싫증이 나면 잎사귀를 모두 따낸 줄기로 머리를 돌돌 말아 아카시아 파마를 하는데 돈 들이지 않고 멋을 낼 수 있어 여자아이들의 열망을 채워줬다. .

세월이 흘러 꿈 많은 여고 시절, 처음 중간고사를 마치고 들뜨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갔다. 집안 형편상 고등학교 진학을 못하고 고향을 지키는 친구와 만나, 달이 환하게 떠 있는 언덕에서 시원한 초록과 눈부시게 하얀 진주알들이 빛나는 풍경을 바라보며 '달고나'처럼 달콤한 향기를 뿌려주는 아카시아 꽃길을 걷고 또 걸었던 추억이 아카시아 꽃향기 속에 그대로 녹아온다.

아카시아 꽃은 이렇게 우리 모두에게 자기만의 독특한 향기를 풍기며 곱고 영롱한 추억들을 간직한 채 고향을 느끼게 해주는 만인의 꽃이다. 그래서일까 실바람을 타고 오는 아카시아 꽃향기는 마음을 설레게 하고 아삼아삼한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아카시아 꽃떨기는 다른 꽃송이들과 달리 눈에 드러나게 매달리지도 않고, 연초록 잎새 틈에 다소곳이 숨어 보일 듯 말듯 꽃초롱을 늘어뜨리고 새하얀 빛깔을 수줍게 감추고 있다. 이런 모습을 '신혼의 어지러운 빛깔 다 접고, 중년의 진동하는 세월 다 머금고, 조강지처처럼 핀다'라고 멋있게 표현한 분도 있다.

오늘은 몇 안 되는 식구들과 손잡고 아카시아 꽃길을 걸으며 아카시아 꽃향기에 취하고, 유년시절 기억의 저편에 있는 추억을 얘기하고, 가족 간의 끈끈한 사랑에 취한다면 5월이 가정의 달이라고 굳이 운운하지 않더라도 이미 행복은 우리 곁에 와 있지 않을까.

김해숙 다사꽃화훼단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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