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수암칼럼]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매주 토요일, 대구의 골목길(이상화 고택이 있는 계산성당 앞 골목)에서는 연극 무대가 펼쳐진다. 일제강점기, 민족정신을 일깨운 시인 이상화의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주제로 식민 국가의 설움과 독립운동 정신을 고취하는 연극이다. 매번 200~600명의 청소년, 학부모들이 참관하는 연극 무대에서 한 가지 느끼는 게 있다. 연극 중반쯤 태극기를 들고 독립 만세를 외치는 여학생이 일본 순사의 칼에 쓰러지면서 노래를 부른다. '기미년(1919년) 3월 1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 독립 만세…'로 시작되는 3'1절 노래다. 그런데 이 노래가 나올 때쯤 초'중학생 관객들의 표정을 보면 한마디로 '멀뚱멀뚱'이다. 입은 물론 다물고 있다. 무슨 노래인지, '기미년'(己未年)이 무슨 뜻인지 모르니 따라 하기는커녕 멀뚱한 게 당연하다. 물론 가사는 더더욱 모른다. 연극의 재미와 리듬이 갑자기 뚝 떨어진다. 어느 참관 교사가 말했다. "다음엔 아이들에게 3'1절 노래를 가르쳐서 보내겠습니다."

요즘 세칭 4대 국경일 노래를 아는 아이들은 열에 둘도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랩'이나 소녀시대의 '소원을 말해봐'나 흥얼거릴까. 케케묵은(?) 국경일 노래를 누가 부르고 배우려 들겠는가. 남북통일 하자고 입버릇처럼 떠들던 정치세력이 집권했을 때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도 흐지부지 음악 교과서에서 지워버린 게 우리네 교육이었다. 연극 무대 앞에서 배우들이 '기미년 3월 1일…'을 노래할 때 벙어리가 돼 앉아있는 아이들을 나무랄 것 없다. 국회의원이란 사람들이 애국가도 안 부르겠다고 부정(否定)하는 세상이니 애들 탓할 염치가 어디 있나?

국가(國歌)를 가진 나라치고 제나라 국가를 부정하고 속칭 '운동권 노래'나 부르겠다는 나라는 지구상에 우리밖에 없다. 왕국인 태국도 일반용 국가와 황실용 국가 두 개를 만들어 행사 때는 두 가지 다 부른다. 생각과 입장이 달라도 국가를 놓고 시비하거나 적대(敵對)하지는 않는다. 영국의 국가 가사엔 '우리 여왕이 다스리도록…'이 들어 있다. 멀쩡한 애국가도 안 부르겠다는 우리네 좌파들 같았으면 '독재'니 뭐니 난리를 피웠을 거다. 독일은 '단결하여 권리와 자유를 지키자'는 가사로 끝난다. 권리와 자유를 입에 달고 다니면서도 무책임과 방종만 일으키는 우리 극좌파와 달리 독일 국민들은 권리도 자유도 국민 '단결'에 귀결시킨다. 세계에서 가장 가사가 긴 그리스 국가는 158행이나 된다. 그래도 가사가 길다 짧다 시비 거는 부류는 없다.

몇 주 지난 동부연합 세력들의 애국가 시비를 새삼 꺼낸 건 오늘이 6'25전쟁 기념일이어서다. 아마도 30대 이하 세대는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조국의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이란 6'25 노래 가사의 1절 첫 소절도 모를 것이다. 그마저도 좌파 정권을 전후해 시나브로 교실에서 사라졌다. 그들이 신줏단지처럼 모시고 따르는 북한을 '조국의 원수'라 부르고 6'25가 남한을 짓밟아 남침했다는 노래를 6'25를 북침이라고 가르쳐온 세력들이 제대로 가르칠 리가 없다. 남의 나라 역사 왜곡엔 길길이 뛰면서 정작 제 아이들에겐 가랑비 옷 적시듯 야금야금 교실에 파고들어 음악마저 이념 잣대로 가르치니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 연극 무대 앞에서까지 '멀뚱이'들이 될 수밖에 없다. 신세대 경찰관들이 일본 극우파가 서울 한복판에 들어와 위안부 비(碑) 옆에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막대를 꽂아도 '나 몰라라' 하는 나라 꼴 역시 그런 교육과 무관하지 않다.

애국가나 경축일'기념일 노랫말 가르치기는 집단 사상 교육이 아니다. 이 땅에서 자유와 민족의 번영을 지키고 이어가기 위해 가르쳐야 할 국민 소양 과목이다.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는 말했다. '애국가는 내 작곡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나는 하느님의 영감(靈感)을 조국의 백성들에게 전했을 뿐입니다.' 애국가든 경축일 노래든 노랫말은 그야말로 '영감'처럼 우리 모두의 가슴에 담아 이어갈 만한 가치가 있는 서사시(敍事詩)다. 영국 에든버러 시(市) 어느 극장에 화재가 나 관중석이 아수라장이 되려 할 순간, 극장 악단이 국가를 연주하자 일제히 '우리는 대영제국의 국민'이란 자긍심이 환기돼 질서 있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국가(國歌)가 무엇인가를 되짚게 하는 일화다. 서해해전, 연평도 포격, 불바다 위협…. '아 아 잊으랴…'는 그래서 아직은 잊어도 될 노래가 아니다.

김정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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