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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활의 고향의 맛] 서해바다 간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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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드팩을 하고 누워 있는 여인의 얼굴 같은 우중충한 갯벌 너머로 바다가 울고 있다. 갑자기 방천시장 출신인 우수의 가수 김광석의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란 노래가 귓바퀴를 돌아 나간다. "비가 내리면 나를 둘러싸는 시간의 숨결 떨쳐질까. 비가 내리면 내가 간직하는 서글픈 상념이 잊혀질까. 잊혀져 간 꿈들을 다시 만나고 파.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나는 곧잘 낯선 경치, 그것도 비 오는 서해 바다 같은 축축하게 젖은 풍경을 만나면 그에 걸맞은 노래를 흥얼거리는 오랜 습관이 있다. 정태춘이 부른 '서해에서'를 제쳐두고 오늘은 왜 비 오는 하늘과 바다에 편지를 쓰고 싶은 것일까. 만 서른둘의 나이로 요절한 비운의 가수의 얼굴이 우울하게 텅 빈 하늘에 걸려 비를 맞고 있다.

서해 쪽에 폭우가 쏟아질 거라는 일기예보를 농담주머니에 집어넣고 아침 7시에 집을 나섰다. 사실 맑은 날 여행을 선호하는 게 일반적인 관례지만 우린 일정을 잡아 놓으면 그날이 비가 오든 눈이 오든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궂은 날 문밖을 나서면 길도 넓고 방값도 싸고 식재료까지 싼값에 구입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린 아침부터 신이 난다.

고속도로 휴게소 퍼걸러에서 갖고 온 찰밥으로 아침을 때우고 당진을 지나 석문방조제 끝에 있는 장고항에 도착하니 에누리 없는 점심시간이다. 화창한 날씨였으면 이곳의 명물 포장횟집들이 활짝 문을 열었을 테지만 '고기잡는집'(010-7180-0776) 딱 한 집만 회 썰고 찌개 끓이고 두서없이 바쁘다. 30명 예약 팀 옆에 우린 새치기로 끼어들었다.

이곳 장고항은 간재미회로 이름난 포구다. 옛날에는 석문방조제 초입의 성구미포구가 간재미로 성시를 이뤘는데 제철소가 들어오면서 명성을 빼앗겨 버렸다. 우리는 간재미 2마리를 2만5천원에 흥정하여 우선 요기부터 하기로 했다. 빗속에서 썰어준 간재미 회무침은 물렁뼈가 씹히면서 쫄깃쫄깃한 게 꽤 먹을 만했다.

원래 간재미는 겨울 음식이다. 눈 오는 겨울, 정말 '징허게' 추운 날, 갓 잡은 싱싱한 놈의 껍질을 벗겨 내고 막걸리로 주물러 회무침을 하거나 엇썬 살점을 된장이나 초고추장에 찍어 먹으면 맛이 일품이다. 음식 맛을 좀 아는 토박이들은 꾸덕꾸덕 말린 반 피뎅이 간재미를 숯불에 구워 먹거나 토막을 쳐 신김치와 함께 푹 끓여 먹으면 얼큰하면서 시원해 해장국으로도 그만이다.

'갱개미'로도 불리는 간재미는 서해안 전역에 서식하는 심해성 어종이지만 특히 태안반도 인근에서 많이 잡힌다. 옛날에는 주낙으로 잡았지만 날이 갈수록 숫자가 줄어들고 있다. 요즘은 낚시로 잡기도 하나 그물에 끌려 나오는 고기들 중에서 상품이 될 만한 것들만 골라 어시장으로 보낸다.

간재미는 암수 모두가 음탕한 편이다. 수컷은 꼬리 양쪽에 두 개의 성기가 튀어나와 있다. 교미를 할 땐 성기를 말아 올려 좀처럼 뺄 수 없도록 장치를 하고 암컷 역시 결합이 분해되지 않도록 결사 항전을 벌인다고 한다. 그래서 낚시에 끌려 올 땐 쾌락을 포기하지 못한 암수 2마리가 동시에 매달려오는 부부애를 보이기도 한다.

수컷보다는 암컷이 훨씬 부드럽고 맛이 좋다. 서해 쪽 간재미가 많이 잡히는 포구에 가서 요리를 주문할 땐 암컷으로 잡아달라고 미리 부탁하는 게 지혜다. 그러나 6월이 지나 암컷 몸속에 알이 차기 시작하면 살이 뻣뻣하고 육질이 나빠져 맛이 한결 떨어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눈 올 때 먹는 겨울 간재미를 최고로 친다.

올겨울에는 눈 내리는 날 장고항에 가봤으면 싶다. 그날도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란 '서른 즈음에'란 노래를 음유시인처럼 읊조리다 하늘나라로 가버린 김광석의 얼굴이 회색 하늘에 걸려 눈을 맞고 있을까.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는 나도 광석이 덕에 간재미회라도 좀 먹었으면 싶고.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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