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나의 살던 고향은] <57> 문차숙 시인의 성주 용암 사곡리

깡촌 소녀 꿈 키워주신 옆집 할매·앞집 아재…

내 고향은 경북 성주군 용암면 사곡동 첩첩산중 두메산골이다. 세월이 참 무상하다. 수십 년 만에 다시 찾은 고향엔 인적이 하나 둘 끊기더니 어느새 골목길도 풀밭으로 변했다. 그러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도 이렇게 정겨운 것은 산골의 소녀로 지냈던 그때의 추억 때문일까.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내 고향은 경북 성주군 용암면 사곡동 첩첩산중 두메산골이다. 세월이 참 무상하다. 수십 년 만에 다시 찾은 고향엔 인적이 하나 둘 끊기더니 어느새 골목길도 풀밭으로 변했다. 그러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도 이렇게 정겨운 것은 산골의 소녀로 지냈던 그때의 추억 때문일까.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제부, 여동생과 함께 간 사곡동 고향 집터. 집이 허물어진 자리에 잡초가 무성하다. 무심한 세월 속에 내 소중한 유년시절의 추억도 사라질까…
제부, 여동생과 함께 간 사곡동 고향 집터. 집이 허물어진 자리에 잡초가 무성하다. 무심한 세월 속에 내 소중한 유년시절의 추억도 사라질까…
유년시절의 추억을 찾아 구룡골에 위치한 용암초등학교를 찾았다. 용이 아홉 마리나 산다는 구룡골의 지기를 누르기 위해 일본인들이 이곳에 학교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유년시절의 추억을 찾아 구룡골에 위치한 용암초등학교를 찾았다. 용이 아홉 마리나 산다는 구룡골의 지기를 누르기 위해 일본인들이 이곳에 학교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시인 문차숙
시인 문차숙

경북 성주군 용암면 사곡동 250번지. 첩첩산중이라서 번지 없어도 우편물이 배달되는 곳이기도 하다. 그야말로 두메산골이다.

그곳에서 나는 유년기와 십오 년을 산과 들로 뛰어 다니면서 산골 소녀로 살았다. 이 작은 마을에서의 내 어린 시절 추억담을 이야기하면 아무도 믿지 않는다.

용암면은 본래 용두면과 성암면 두 개 지역이 일제시대 때 통합, 용암면이 되었다. 이곳 사람들의 대부분은 작은 규모의 논농사와 밭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하지만 요즘은 참외농사를 지으며 부농을 꿈꾸고 있다.

용암면의 다른 이름인 '적산'은 어떻게 해서 불려졌는지는 모른다. 당시 큰 갓(큰 산을 옛날에는 그렇게 불렀음)에서 황토 색깔의 찰흙이 많이 나왔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인지 모른다. 우리는 그것으로 소와 강아지 모형을 만들어 방학숙제로 제출했던 기억이 있다.

우리 집 앞마당에서 숨바꼭질을 하며 친구들과 놀 때에는 멀리 큰 갓 꼭대기에서 노루가 귀를 쫑긋 세우고 서서 구경을 하곤 했다. 물론 밤에는 너구리 울음소리도 가끔 들렸고, 살쾡이가 닭장의 닭들을 물어가곤 했다. 그래서 우리 집에는 항상 강아지를 키웠다. 한식구였다. 물론 그 강아지는 내 차지였으며 그 강아지도 나를 무척 따르곤 했다.

내가 학교를 마치고 올 때면 강아지가 동구 밖 조상걸(돌무덤)까지 마중 나와서 신발주머니를 받아 목에 걸고 가기도 했다. 지금도 나는 가끔 그 강아지를 그리워한다.

우리 집에서 바로 보이는 '큰 갓'이란 산이 '문필봉'이다. 그래서 우리 집 앞마당에서 뛰어놀며 유년기를 보냈던 내가 시인(詩人)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도 들을 수 있었다. 영 거짓말은 아닌지 아버지와 나, 바로 아래 동생까지 모두 글을 쓴다.

내 고향은 아주 작은 마을이었다. 친구라고는 고작 맹숙이, 하나밖에 없을 정도였다. 그러니 자연이나 동물과 친구할 수밖에 없었고 어른들은 저녁을 먹고 나면 우리 집 사랑방에 모여 장기를 두면서 시간을 보냈다.

나는 그때 어깨너머로 익힌 장기를 지금도 심심풀이로 두기도 한다.

아버지는 네 딸 중에 유독 나에게 아들 몫을 기대하셨는지 어릴 적부터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다. 족보에 대해서, '음양오행'과 일가친척들의 관계인 '촌수', 구구단, 주산 등을 가르쳐 주시면서 가을걷이가 끝나고 곡물 장수가 오면 꼭 내게 셈을 하라고 하셨다.

멀리서 집안 어른이 오시면 당신의 옆자리에 나를 꿇어앉히시고는 내 자랑을 잔뜩 늘어놓으시기도 했다. 그때 나는 당숙, 재종간, 삼종 등 촌수에 대해서 훤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 시절에 배운 것들이다. 또한 윤리와 도덕 교육의 대부분을 할머니와 아버지한테서 배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골목 입구에는 버드나무가, 도랑 건너에는 어린 미루나무가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내게 "사람은 저 버드나무처럼 어디에 심느냐에 따라 살아가는 방법이 다르다. 수양버들처럼 물가에 심겨져 흔들흔들 물살에 휘말리며 살 수 있고, 저 미루나무처럼 큰 산 언저리에서 큰 나무들과 함께 살아가기도 한다"고 하시면서 큰 산에서 큰 나무로 살아가라고 말씀하셨다.

초등학교까지는 십 리 길이었다. 끝없는 산모퉁이를 돌아 서너 개의 고갯마루를 넘어가면서 오다가다 만나는 들꽃과 얘기하며 학교를 다녔다. 몸이 약한 내가 학교에서 돌아올 때면 할머니께서 늘 마중을 나오셨고 나는 할머니와 걸으면서 매일 '옛날이야기를 해 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여름 장마철이면 스피커를 통해 "동락, 사곡동 제군들은 교문 앞으로 나오세요." 라는 소리가 들렸다. 냇물이 불어나 집에 갈 수 없다는 걱정보다는 수업을 빼 먹고 친구들보다 일찍 집으로 간다는 생각에 들떠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참으로 철이 없었다.

줄을 지어 둑에 올라서면 저 건너편에 붉은 깃대를 꽂아두고 마을 어른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우리 아버지는 마을 대표로 나와 아이들 하나하나 겨드랑이에 끼고 다 건너 주셨다.

지금은 콘크리트 다리가 그 위에 섰다. 콘크리트 다리가 놓인지 얼마 지나서일까? 다리 밑에서 천막 극장이 한 번 열렸는데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빠 몰래 엄마와 구경을 한 것이 난생 처음 영화를 본 것일게다. 십 리 길을 걸어가서 본 영화, 그것이 최초의 문화생활이었다.

나는 고향에서 중학생 때까지만 살았다. 중학교까지는 더 먼 시오 리, 이십 리 길은 족히 되었던 것 같다. 처음엔 아버지께서 자전거로 태워 주셨고 그 다음부터는 언니가 나를 자전거 앞자리에 태워 주기도 했다.

중학교 3학년 때이던가 특별반 수업을 마치고 캄캄한 밤에 혼자 걸어 갈 때면 부엉이가 산 아래까지 내려와 '부엉부엉' 울어 제쳤다. 나는 그 붕엉이가 제일 무서웠다. 언제 달려들어 내 눈알을 빼 먹을지 모를 일이었다.

사실 식질이라는 동네 모퉁이를 돌아서면 여우가 흙을 파고 돌을 던진다는 이야기와 도깨비가 나와서 춘희 아버지를 웅덩이에 빠뜨렸다는 말이 심심찮게 나돌았다.

피 묻은 빗자루가 밤이면 도깨비가 된다고 굳게 믿었던 때다. 그래서 가끔 자신이 없을 때는 냇가의 과수원집에 들러 좀 데려다 달라고 부탁을 하면 과수원집 아저씨는 경운기를 몰고 나를 태워 주셨다.

털 털 털 털, 곧 부서질것 같은 경운기가 중간쯤 가면 저 멀리 호야등을 들고 어둠 속에 내 이름을 부르시며, 할머니가 마중 나온다.

나는 그때 청운의 꿈을 가슴에 심었다. 열악한 환경, 두메산골에서 당시 빚진 사람들에게 갚을 심지를 가슴 깊숙이 박았다. 피곤한 저녁상을 물리고 이름도 모르는 나를 자주 태워 주셨던 과수원집 아저씨, 호야등을 들고 늦은 밤 마중을 나오시는 할머니, "네가 고추를 달고 나왔으면…" 하시면서 아쉬움에 아들 몫을 기대하시는 아버지, 야물고 똑똑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시던 마을 어른들, 모두에게 나는 빚을 갚고 싶었다. 참으로 가당찮은 꿈을 심었지만 나는 아무것도 갚지 못했고 그들은 나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아니 과수원집 아저씨는 어딘가에 살아 계실지도 모른다. 용정리 냇가의 과수원집 아저씨가 말이다.

말없는 세월이 저만치 앞서가는 지금, 뉴질랜드로 이민 간 언니도 보고 싶다. 교복을 다려주고 하얀 운동화가 더럽다고 치약을 발라주던 언니, 또 그 친구들은 얼마나 나를 사랑했는가. 저들이 노는 곳에 가고싶어 안달하면 은근슬쩍 나를 끼워 주던, 말순 언니와 지금은 중학교 교사가 되신 정혜 언니. 나는 주로 언니들과 놀았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또래집단에 잘 어울리지 못하고 나이 많은 사람들과 잘 어울린다.

그 후 내가 대구로 유학(?)을 오면서부터는 동생들 넷 모두가 대구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언니가 우리들을 보살피는 학부모 역할을 한 셈이다. 물론 사흘이 멀다 하고 어머니께서 다녀가시긴 했지만, 그 산골짜기에서 우리 부모님은 열성 학부모, 극성 엄마였는지 모른다.

어렸을 적부터 부모님을 떠나 객지 생활을 한 탓인지 동생들 모두 제 앞가림을 잘 하면서 살고 있다. 언젠가 어느 기업대표가 쓴 글이 가슴에 박힌다.

"솔잎은 바람에 날려 저 멀리 떨어지기 때문에 번식력이 우수하고 생명력이 강하다. 사람도 제 고향을 떠나, 부모 곁을 떠나야 잘 살아간다. 그래서 본인은 아들을 외국으로 내 보낸다"고 했다.

흔히 고향은 어머니 품속, 자궁과 같다고 한다. 나는 유년의 기억, 짧은 십오 년의 삶을 삼십 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 우려먹는다. 바쁘게 보냈다는 기억, 정신없이 시간을 갉아먹었다는 아쉬움, 그러면서 늘 유년의 허름한 산골 마을을 그리워하면서 언젠가 내가 그곳에 가서 살아야 할 곳으로 점지해 놓고 있다. 그러고 보면 나는 돌아갈 집이 있어 행복한 것이다.

시인 문차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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