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권의 본명은 임영일(林榮一)입니다. 오케그랜드쇼가 함경도 청진에서 공연 중일 때 무대 뒤로 작업복 차림의 한 청년이 찾아와서 이철 사장과 작곡가 박시춘에게 노래 테스트를 받고 싶다는 뜻을 전했습니다. 마침 조용하던 시간이라 두 사람은 흥미를 느끼고 청년에게 노래를 시켰는데, 뜻밖에도 남인수의 '꼬집힌 풋사랑'을 너무도 분위기를 잘 살려서 부르는 것이 아닙니까? 당시 오케그랜드쇼는 결핵이 악화된 남인수가 공연에 불참해서 풀이 죽어있던 터라, 이철은 그 자리에서 청년을 남인수의 대역으로 출연시킬 것을 결정했습니다. 그날 밤 공연에서 임영일은 '청진의 남인수'로 소개되어 큰 박수를 받았고, 일행과 함께 서울로 와서 정식으로 가수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임영일이 이인권이란 예명을 정식으로 쓰게 된 것은 1938년 10월 서울 부민관 공연이었습니다. 하지만 임영일은 데뷔 초기 오케와 빅터 두 회사에서 동시 전속으로 활동하게 되는 혼란을 빚었습니다. 임영일의 재능을 탐낸 빅터사에서 임영일을 유혹해서 빼돌린 것이 혼란의 원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해프닝은 잠시였고, 이인권은 오케 전속으로 확정되어 다수의 음반을 취입 발표했습니다. 식민지 시절에 발표한 이인권의 대표곡들은 '눈물의 춘정' '향수의 휘파람 '잃어버린 천사' '꿈꾸는 백마강' 등입니다.
이 가운데서 1940년 11월에 발표한 '꿈꾸는 백마강'(조명암 작사'임근식 작곡'이인권 노래, 오케 31001)은 이인권의 위상을 단번에 반석 위에 앉힌 대표곡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 노래는 멸망한 백제의 비극적 사실을 환기시키면서 나그네의 시각으로 식민지 체제의 고통과 상실감을 은근히 애절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이 노래는 크게 히트하였고, 높은 인기를 두려워한 조선총독부에서는 즉각 발매금지 조치를 내렸습니다. 이 '꿈꾸는 백마강'은 광복 이후 또다시 금지가요로 묶이는 불운을 겪었습니다. 그 까닭은 1965년 방송윤리위원회가 이 노래의 작사자 조명암의 월북 사실을 지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서 문화에 대한 정치적 금지란 것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덧없는 행태인가를 깨닫게 되면서 이 노래는 대중들의 사랑 속에서 저절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이인권은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오케, 빅터, 태평레코드사 등 3대 제작사를 통해 다수의 가요작품을 취입 발표하였습니다. 빅터에서 발매한 음반에는 임영일이란 본명으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인권은 가수이면서 동시에 작곡가, 작사가, 기타 연주자 등으로 음악적 재능이 두루 뛰어난 만능 대중예술인이었습니다. 가수 데뷔 직전 포리도루레코드사에서 작곡가로 여러 편의 가요작품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광복 이후 악극과 드라마, 영화음악 분야에서도 탁월한 공적을 쌓았습니다. 1950년대 이후로는 노래보다 작곡 분야에서 한층 두드러진 활동을 펼쳤습니다. 당시 이인권이 작곡한 작품으로는 '꿈이여 다시 한 번'(현인 노래), '카츄샤의 노래'(송민도 노래), '원일의 노래' '외나무다리'(최무룡 노래), '들국화'(이미자 노래), '바다가 육지라면'(조미미 노래), '후회'(나훈아 노래) 등 다수가 있습니다.
노래 잘 부르던 함경도 청년 이인권은 한국대중음악사에 크나큰 공적을 남기고, 1973년 5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영남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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