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계산동에서] 술 먹이는 법정

로봇
mWiz 이 기사 포인트

"그날 혹시 술 마시지 않았나요?"

예전엔 재판장들이나 변호인들은 가끔 법정에서 피고인에게 술을 먹였다. 물론 진짜 술을 먹인 건 아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범행 당시 술 마신 걸 강조하거나 안 먹은 술을 억지로 먹여서라도 형량을 줄여주고 싶은 고육지책의 하나였다. 범행 시 술에 취했다면 '심신미약' 상태로 인정돼 법정형 감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판사들은 객관적인 범죄 사실 앞에서 냉정해야 하고 죗값을 있는 그대로 치르게 해야 한다. 안 먹은 술까지 먹여 형량을 낮춰준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온정주의라는 비판을 받을 만하다. 피해를 당한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정당한 법 집행으로 그들의 찢긴 몸과 마음, 그리고 상처를 조금이라도 위로해야 한다. 잘못한 사람에게는 법의 엄중함을 절실히 느끼게 해 다시는 범죄를 저지르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몰아세우기에도 개운치는 않다. 법정은 죽은 공간도, '1+1=2'란 식의 수학적인 정답이 결정돼 있는 곳도 아니기 때문이다. 눈물과 따뜻한 피가 흐르는 살아 있는 곳이 바로 법정이다.

똑같은 죄명이라 하더라도 범행 동기나 의도, 수단, 과정, 정황 등에 따라 죄질은 크게 차이 날 수 있다. 예를 들어 초범이 벌벌 떨며 가게에 들어가 금품을 훔치다 주인에게 잡히는 바람에 놀라 허겁지겁 도망치다 뿌리쳤는데 주인이 넘어져 다치면 강도상해다. 금품을 훔치기 위해 양심의 가책도 없이 마구 폭력을 휘둘러도 강도상해다.

물론 둘 다 해서는 안 되는 범죄이고 이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도 둘 다 똑같이 강도상해의 양형 기준인 징역 7년 이상을 선고하기엔 안타까운 구석이 없지 않다. 양형 기준으로는 이 둘의 차이를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금품을 훔치기 위해 마구 때린 것도 아니고 도둑질하러 들어갔다 훔치지도 못한 채 도망치다 밀려 넘어뜨린 죄 치고는 분명히 세다.

초범, 소극적인 범행, 합의 등 정상을 최대한 참작해도 강도상해의 양형 기준이 높아 3년 6개월의 징역을 살아야 한다. 그래서 술을 먹여서라도 조금 더 감형해 집행유예를 판결하고 싶을 수 있다. 징역, 금고 3년 이하일 때 집행유예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시비를 걸어 마구 폭력을 휘둘러도 폭행이고, 시비에 말려들지 않으려 노력하다가 소극적 저항이나 발을 빼다가 밀쳐도 폭행이다. 그런데 둘 다 똑같은 형량을 선고하는 것은 불공평하지 않을까.

그런데 이제는 '법정에서 술을 먹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음주 폭력에 대한 처벌이 강화됐기 때문이다. 최근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주폭 처벌을 강화하고 주취 감경을 사실상 없애는 등 술을 마시고 저지르는 범죄에 대해 단호하게 칼을 뽑아들었다.

여기에다 술과 범죄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강해졌다. 얼마 전 여론조사기관인 한국갤럽이 전국 만 19세 이상 남녀 606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우리 사회의 음주 폭력이 얼마나 심각한지'에 대한 설문조사에서 절반 이상인 51.6%가 '매우 심각하다', 34.4%는 '어느 정도 심각하다'고 답했다. '술에 취했더라도 형을 깎아줘서는 안 된다'는 의견도 무려 94%나 됐다.

술에 취한 채 휘두르는 폭력을 근절시켜야 한다는 것엔 절대 동의한다. 아무리 술을 마셨더라도 '술 마시고 한 일은 눈감아 줄 수 있다는 사회의 암묵적인 동의'도 사라져야 한다.

그런데 주폭 처벌 강화로 재판장의 재량에 영향을 미쳐 법정의 여백까지 사라지는 것 같아 안타깝기도 하다. 우리나라처럼 법정형이 무겁고 특별형법도 많은 상태에서, 게다가 지금의 양형 기준이 같은 죄목의 다른 죄질을 구별할 수 없는 한 꼭 '술'이 아니더라도 재판장의 재량을 인정할 수 있는 뭔가는 여전히 필요하지 않을까.

최신 기사

0700
AI 뉴스브리핑
정치 경제 사회 국제
이진숙 전 방송통신위원장은 대구시장 선거에 출마하며 대구의 '첫 여성 단체장' 시대를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대구의 경제적 문제를 해...
이달 원/달러 환율이 1,470원을 넘어서며 1998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한 가운데, 중동 전쟁의 여파로 원화가치가 급락하고 있어 1,500...
경기 남양주에서 20대 여성을 살해한 40대 남성 A씨가 의식 불명 상태로 경찰의 구속영장 신청이 지연되고 있으며, A씨는 범행 후 전자발찌...
이스라엘과 미국의 이란 폭격으로 중동 전쟁이 발발한 가운데, 이란 이슬람혁명수비대(IRGC)는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를 살해하겠다고 공언했으..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