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혹시 술 마시지 않았나요?"
예전엔 재판장들이나 변호인들은 가끔 법정에서 피고인에게 술을 먹였다. 물론 진짜 술을 먹인 건 아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범행 당시 술 마신 걸 강조하거나 안 먹은 술을 억지로 먹여서라도 형량을 줄여주고 싶은 고육지책의 하나였다. 범행 시 술에 취했다면 '심신미약' 상태로 인정돼 법정형 감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판사들은 객관적인 범죄 사실 앞에서 냉정해야 하고 죗값을 있는 그대로 치르게 해야 한다. 안 먹은 술까지 먹여 형량을 낮춰준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온정주의라는 비판을 받을 만하다. 피해를 당한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정당한 법 집행으로 그들의 찢긴 몸과 마음, 그리고 상처를 조금이라도 위로해야 한다. 잘못한 사람에게는 법의 엄중함을 절실히 느끼게 해 다시는 범죄를 저지르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몰아세우기에도 개운치는 않다. 법정은 죽은 공간도, '1+1=2'란 식의 수학적인 정답이 결정돼 있는 곳도 아니기 때문이다. 눈물과 따뜻한 피가 흐르는 살아 있는 곳이 바로 법정이다.
똑같은 죄명이라 하더라도 범행 동기나 의도, 수단, 과정, 정황 등에 따라 죄질은 크게 차이 날 수 있다. 예를 들어 초범이 벌벌 떨며 가게에 들어가 금품을 훔치다 주인에게 잡히는 바람에 놀라 허겁지겁 도망치다 뿌리쳤는데 주인이 넘어져 다치면 강도상해다. 금품을 훔치기 위해 양심의 가책도 없이 마구 폭력을 휘둘러도 강도상해다.
물론 둘 다 해서는 안 되는 범죄이고 이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도 둘 다 똑같이 강도상해의 양형 기준인 징역 7년 이상을 선고하기엔 안타까운 구석이 없지 않다. 양형 기준으로는 이 둘의 차이를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금품을 훔치기 위해 마구 때린 것도 아니고 도둑질하러 들어갔다 훔치지도 못한 채 도망치다 밀려 넘어뜨린 죄 치고는 분명히 세다.
초범, 소극적인 범행, 합의 등 정상을 최대한 참작해도 강도상해의 양형 기준이 높아 3년 6개월의 징역을 살아야 한다. 그래서 술을 먹여서라도 조금 더 감형해 집행유예를 판결하고 싶을 수 있다. 징역, 금고 3년 이하일 때 집행유예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시비를 걸어 마구 폭력을 휘둘러도 폭행이고, 시비에 말려들지 않으려 노력하다가 소극적 저항이나 발을 빼다가 밀쳐도 폭행이다. 그런데 둘 다 똑같은 형량을 선고하는 것은 불공평하지 않을까.
그런데 이제는 '법정에서 술을 먹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음주 폭력에 대한 처벌이 강화됐기 때문이다. 최근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주폭 처벌을 강화하고 주취 감경을 사실상 없애는 등 술을 마시고 저지르는 범죄에 대해 단호하게 칼을 뽑아들었다.
여기에다 술과 범죄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강해졌다. 얼마 전 여론조사기관인 한국갤럽이 전국 만 19세 이상 남녀 606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우리 사회의 음주 폭력이 얼마나 심각한지'에 대한 설문조사에서 절반 이상인 51.6%가 '매우 심각하다', 34.4%는 '어느 정도 심각하다'고 답했다. '술에 취했더라도 형을 깎아줘서는 안 된다'는 의견도 무려 94%나 됐다.
술에 취한 채 휘두르는 폭력을 근절시켜야 한다는 것엔 절대 동의한다. 아무리 술을 마셨더라도 '술 마시고 한 일은 눈감아 줄 수 있다는 사회의 암묵적인 동의'도 사라져야 한다.
그런데 주폭 처벌 강화로 재판장의 재량에 영향을 미쳐 법정의 여백까지 사라지는 것 같아 안타깝기도 하다. 우리나라처럼 법정형이 무겁고 특별형법도 많은 상태에서, 게다가 지금의 양형 기준이 같은 죄목의 다른 죄질을 구별할 수 없는 한 꼭 '술'이 아니더라도 재판장의 재량을 인정할 수 있는 뭔가는 여전히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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