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박현수의 시와 함께] 일인용 욕조/ 정영효

혼자 벗은 채, 벗어야만 들어가는

욕조 속 물의 질감은 온도 이외의 것

살이 자라온 느낌과 닮았고 친숙한 돌기들이

비벼대는 듯

피로한 시계(視界)에서 긴장은 무너진다

어쩌면 이건 내가 처음으로 한 발짓을 품던 결

늘어난 무게를 빛으로 이어주었던 흐름

태초의 생이 태초의 소리를 빚었다면 욕조에

서처럼

움츠린 자세로 외롭게, 천천히

가는 숨 한줌을 찾았을지도 모르는 일

넘치는 만큼 달아나는 부력과 넘칠수록 더해

지는 중력에

혼자 놓인 채, 생각하는 동안

욕조 속 물의 밀도는 지금 이전의 것

컴컴한 대기를 떠돌고

빙하의 균열에서 새어나왔을 장고의 시간

물로 들어가거나 뭍으로 나온 짐승 모두

제 피를 연명하는 장기(臟器)를 가졌지만

겨우 좁은 몸통을 껴안고 있을 뿐

가장 아늑한 품에 가장 오래된 분위기에

혼자 묻힌 채, 물어봐야 하는

욕조 속 물의 깊이는 죽음 이후의 것

얕은 바닥에 누웠는데도 온밤이 정지한 기분

고향이면서 무덤인, 결국 혼자인

시인은 하나의 대상에 생명을 부여해주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빨리 발음되어야 한다고, 즉 '신'으로 읽혀야 한다고 우스개를 하는 시인도 있습니다. 시인을 만나고도 생명을 얻지 못하는 대상만큼 불행한 경우도 없을 겁니다.

일인용 욕조에 몸을 담가본 경험은 누구나 있지만, 그로부터 이 시와 같은 생각을 끌어낸 이는 없을 겁니다. 이런 생각을 언어로 구체화하는 것이 바로 우리 시대에 시인의 역할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세상의 일인용 욕조도 행복해질 것입니다.

시인'경북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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