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서희의 추억

서기 993년 거란이 고려를 침공하자 서희가 협상에 나서 거란군을 돌려보내고 북방의 영토까지 얻었다. 이른바 '서희담판'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성공한 외교로 칭송받는다. 그러나 이 성공적인 외교는 위험한 인식의 단초일 수도 있다.

1894년 6월부터 1895년 4월까지 청(淸)나라와 일본이 싸웠다. 청나라는 평양전투와 황해전투에서 연패한 뒤 미국의 중재로 시모노세키 강화회담에 임했다. 청나라의 전권대사는 리홍장이었고, 일본의 전권대사는 이토 히로부미였다. 리홍장은 이이제이(以夷制夷)로 열강들을 서로 견제시키며 양보'타협을 끌어냈고, 시모노세키조약, 청'러밀약, 베이징조약 등에 깊이 관여한 그야말로 외교의 달인이었다.

리홍장은 강화 조건으로 '조선에 대한 종주권 포기'만 약속하려고 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의 독립, 요동반도 할양, 전쟁배상금 등을 요구했다. 두 대사가 회담을 하는 동안 일본은 군대를 계속 진군시켰다. 청나라 해군기지가 있던 위해위(爲海衛)를 점령하고, 곧바로 베이징으로 향했던 것이다. 베이징이 위험해지자 리홍장은 이토 히로부미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1876년 1월, 일본은 운요호 포격에 대한 책임을 물어 조선과 회담을 요구했다. 4차례에 걸친 회담에서 조선은 '쌀 교역, 외상 선매, 타국인과 혼래(混來), 아편 수입, 서교(西敎) 유포' 등을 금지하는 내용을 조약에 넣기를 원했다. 일본 측 대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근해에서 일본군 함대가 연일 함포를 쏘아대며, 당장이라도 회담 결렬을 선언하고 한양성으로 진군할 태세를 보였다. 결국 조선은 일본이 요구한 12개 조항을 모두 받아들였다.

외교는 '논리나 말싸움'이 아니다. 회담에 임하는 전권대사의 개인 능력이 결정적인 것도 아니다. 회담장의 만남은 결국 도장 찍는 행위이며, 내용은 회담장 밖의 군대에 의해 결정된다. 청일전쟁, 운요호사건뿐만 아니라 러일전쟁,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무수한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싫든 좋든 나를 지키는 힘은 무력이다. 외교적 담판은 상대의 상황, 판단 실수, 호의에 따라 가변적이다. 게다가 담판은 미봉책에 불과하다. '서희담판' 이후에도 계속된 거란의 2차, 3차 침입이 이를 증명한다. 거란의 침입은 강감찬의 귀주대첩(1019), 즉 무력 대응 성공 이후에야 멈췄다. 2013년 국방 예산 삭감이 논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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