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수리 시간 -김이듬(1966∼)
독수리는 일평생의 중반쯤 도달하면 최고의 맹수가 된다
눈 감고도 쏜살같이 먹이를 낚아챈다
그런 때가 오면 독수리는
반평생 종횡무진 누비던 하늘에서 스스로 떨어져
외진 벼랑이나 깊은 동굴로 사라진다
거기서 제 부리로 자신을 쪼아댄다
무시무시하게 자라버린 암갈색 날개 깃털을 뽑고
뭉툭하게 두꺼워진 발톱을 하나씩하나씩 모조리 뽑아낸다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며 며칠 동안 피를 흘린다
숙달된 비행을 포기한 채 피투성이 몸으로
다시 태어나기 를 기다린다
이제는 무대에 오르지 않는
아니
캐스팅도 안 되고 오디션 보기도 어중간한 중년여자
연극배우가 술자리에서 내게 들려준 얘기다
너무 취해서 헛소리를 했거나 내가 잘못 옮겼을 수도 있겠지만
아직도 확인해보지 않았다
그냥 믿고 싶어서
경사가 급한 어두운 골목길 끝에 있는 그녀의 방까지
나는 바짝 마른 독수리 등에 업혀갔다
-계간 「시인수첩」 2012년 여름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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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듬 시인의 시 중에서 각별하게 다가온다. 종래의 시들은 부조리한 세계의 가면을 벗기는 싸움의 과정이었다면, 근작인 이 시는 꽁꽁 처매둔 자신의 가슴을 한 올 한 올 벗겨가는 자아 투쟁의 전초전 같다. 분명히 다른 호흡이다. 칼을 쓰는 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밖으로 향하고, 하나는 내면을 향한다. 밖을 향한 칼은 날을 상하지만 내면을 향한 칼은 벼려진다. 자르거나 다듬거나 마찬가지다.
맹금류가 정상에서 환골탈태의 시간을 갖는 이야기는 경이롭다. 사람의 일도 그러하다. 가장 좋을 때 겸손을 벼리고 다듬어서 장착해야 한다. 주체를 제자리에 바르게 세우는 작업이다. 당연히 내면과 세계의 길항으로 이어진다. 이 이야기를 옮긴 시인의 마음자리가 그런 즈음일 거라는 짐작이다. 깃발은 바람에 나부껴야 흔들리지 않는 주체를 가지는 법이다.
안상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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