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 자리 어울리는 청백리는 없는가…

대한민국 인사청문회 백서

'노블레스'(사회적 지위)는 있고, '오블리주'(지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는 없다. 최근 대한민국의 모습이 그렇다.

새 정부의 일꾼으로 지명된 사람들의 온갖 비리(법에 어긋나는 일)'비위(도리와 이치에 어긋나는 일) 의혹에, 뇌물 먹고 구속된 정권 실세들이 '초고속'으로 사면되는 모습에 국민들은 실망을 넘어 경악을 표현하고 있다.

이게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높은 지위를 이용해 '국민 몰래 한탕 해먹는' 비리'비위는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비리'비위를 저지른 사람이 고위공직에 임명되는 것을 막는 제도인 인사청문회가 마련됐고, 그 대상은 점차 확대됐다. 하지만 미국 등 선진국과 비교하면 제도적으로 보완해야 할 점이 많다는 목소리가 크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투철한 도덕의식을 바탕으로 솔선수범을 실천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래서 계층 간 대립을 해결할 수 있는 최고의 가치로 여겨지지만 지금 대한민국에는 너무 부족하다는 평가다. 이런 상황에 '국민대통합'식의 말뿐인 구호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민주주의 건강하게 만드는 따끔한 주사, 인사청문회

인사청문회는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위해 필수적인 제도다. 미국에서 1787년 도입할 때 취지가 그랬다. '미국 헌법의 아버지'라 불리는 제임스 메디슨은 "국가권력을 단순히 3개(입법'행정'사법)로 나눈다고 삼권분립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서로 견제해야 한다"며 "특히 대통령이 막강한 권한을 갖는 체제에서는 대통령의 인사권에 대한 국회의 강력한 견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제도로 상원의회가 맡는 인사청문회가 도입된 것.

우리나라에서도 1980년대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의 심화 과정에서 인사청문회의 도입 필요성이 끊임없이 제기됐다. 김영삼 정부 시절 고위공직자 재산공개 분위기가 일었고, 김대중 정부 시절 마침내 인사청문회법이 제정됐다. 인사청문회 대상은 처음에 국무총리 등 23명으로 시작한 것이 점점 확대되며 현재 60명으로 늘어났다.

◆2000년 인사청문회 시대 개막

우리나라 인사청문회의 도입 역사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렇다.

박정희'전두환 등 이른바 군사정권 시절에는 고위공직자의 비리'비위가 사회적으로 거론되는 경우가 드물었다. 모두가 '청백리'였던 까닭일까? 그보다는 정부의 강력한 통제시스템 때문에 고위공직자들의 행동이 밖으로 공개되지 않는 이유가 크다. 고위공직자의 임명 절차 역시 국민에게 잘 공개되지 않았다.

김영삼 정부 들어서며 고위공직자에 대한 언론의 검증과 야당의 견제 등 사회적 압력 분위기가 형성됐다. 특히 언론은 정부 장관 후보자들의 재산형성 과정을 파헤쳐 앞다퉈 보도하기 시작했다. 1993년 3월 박양실 당시 보건사회부 장관은 언론을 통해 부동산 투기 의혹이 제기되자 곧 물러났다.

여론이 들끓자 청와대는 곧장 '자진납세' 자세를 취했다. 장관급 이상 29명, 청와대 수석비서관급 이상 11명 등 고위공직자 40명의 재산을 공개한 것. 역대 정부 사상 처음이었다. 이들 중 부동산 투기'재산 은닉 등이 밝혀진 당시 강신태 철도청장, 조규일 농림부 차관 등이 물러났다.

이런 분위기 속에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0년 6월 인사청문회법이 제정됐다. 이한동 전 국무총리가 최초로 청문회를 거쳤다. 이후 청문회의 벽을 넘지 못하는 후보자들이 숱하게 나오기 시작했다. 2002년 7월 당시 장상 국무총리 후보자가 위장전입'아들의 이중국적 문제 등의 의혹으로, 곧이어 같은 해 8월 장대환 국무총리 후보자 역시 10여 건이 넘는 부동산 투기'부인의 임대소득 탈루 등의 의혹으로 임명동의안이 부결돼 낙마했다.

인사청문회 대상자는 점점 확대됐다. 김대중 정부 말기 국가정보원'검찰'국세청 등의 고위급 인사가 연루된 '이용호 게이트'가 터지자 그 여파로 2003년 1월 인사청문회법이 개정됐다. 국가정보원장'검찰총장'국세청장'경찰청장 등 일명 권력기관 '빅4'가 청문회 대상에 추가된 것.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5년에는 모든 국무위원(장관)이 청문회 대상에 포함됐다. 여기에 2008년에는 방송통신위원장이, 지난해에는 한국은행 총재를 포함한 5개 직책이 포함됐다.

◆도덕성 검증에 주력하는 우리나라 인사청문회

인사청문회가 검증하는 것은 대체로 두 가지다. 후보자의 직무 수행 능력과 직무에 부합하는 도덕성이다. 그런데 전문가들은 우리나라 인사청문회가 도덕성 검증에 다소 치중한다는 분석을 내놓는다.

중앙대 손병권 교수는 '국회 인사청문회의 정치적 의미, 기능 및 문제점' 논문에서 "유교적 정치문화가 지배적인 까닭에 인사청문회에서 도덕적 문제를 제기하는 질의가 많이 나온다"고 분석했다. 2009년 정운찬 국무총리 후보자를 두고 벌어진 인사청문회가 한 예다. 손 교수가 2009년 9월 21일 자 청문회의록에 인쇄된 글자 줄 수를 계산해봤더니 12명(여당 의원 6명, 야권 정당 의원 6명)의 청문위원들은 정책 질의를 3천767줄(46.9%) 한 반면, 도덕성 질의는 4천263줄(53.1%)을 했다.

이는 다시 '여방야공'(여당은 방어, 야당은 공격)의 특징으로 분석된다. 당시 여당 의원들은 정책 질의(65%)에 치중한 반면 야당 의원들은 도덕성 질의(67%)에 치중했다. 손 교수는 "여당은 정책 질의에 치중한다. 그런데 후보자의 정책 능력과 식견을 검증하기보다는 후보자가 점수를 딸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측면이 크다"며 "반대로 야당은 후보자의 도덕적 약점을 최대한 공격하는 측면이 크다"고 분석했다.

◆부동산투기'위장전입…인사청문회 단골메뉴

도덕성 검증이 부각되는 인사청문회가 계속 이어지면서 후보자의 비리'비위 단골메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후보자는 청문회에 병역'재산'납세 관련 서류를 제출하는데 여기서 병역비리(기피)'부동산투기'위장전입'세금탈루 등의 문제가 드러났다. 같은 분야에서 자신은 물론 배우자 및 가족의 비리'비위도 파헤쳐졌다. 이외에도 학자 출신 후보자가 늘면서 논문 표절이나 중복 게재'허위학력 기재 등 경력 관련 문제도 밝혀졌다. 또, 자녀의 부정입학'이중국적 문제도 끊이지 않았다.

2000년 인사청문회법 제정 이후 청문회를 거쳤거나 청문회를 앞두고 낙마한 사례는 최근 김용준 전 국무총리 지명자까지 포함해 모두 14명이다. 낙마 사유(의혹)로는 부동산투기가 8건으로 가장 많았다. 주로 자녀를 희망 학교에 진학시키기 위해 해당 학군으로 주소지를 옮기는 위장전입도 7건으로 뒤를 이었다. 물론 부동산투기를 위해 위장전입을 한 사례도 중복 포함됐다.

◆업그레이드 필요한 인사청문회

최근 인사청문회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미국처럼 사전 검증부터 철저히 이뤄지도록 하자는 것.

그러려면 일단 후보자 평판에 대한 검증 부분이 미비하다는 지적이 가장 많다. 우리나라는 후보자가 청문회에 직계 존속(부모'조부모 등)'직계 비속(아들'손자 등)'배우자 관련 7가지 서류를 제출한다. 반면 미국은 직계 존'비속 및 배우자는 물론 이혼한 전 부인, 의붓아버지, 의붓어머니, 이복'이종형제, 전 직장상사, 가정부와 정원사 등 고용부, 과거 7년 거주지별 이웃 1인 등의 인적사항까지 서류로 작성해 제출해야 한다. 이에 대한 조사를 미 연방수사국(FBI)이 맡는다. 그런 다음 상원의회가 맡는 청문회 단계로 이어진다. 그만큼 후보자의 평판을 최대한 꼼꼼히 그리고 객관적으로 검증하겠다는 것.

시간도 충분하게 준다. 대통령의 사전 인선'행정부의 인준 준비'상원의회의 인준 등의 기간을 모두 합쳐 1년여를 쓰기도 한다. 반면 우리나라는 정부가 국회에 임명동의안을 제출하면 20일 안에 모든 인사청문회 일정을 끝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청문회를 무사히 통과하고도 미처 발견하지 못한 비리'비위 문제가 나중에 터져 나오기도 한다.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는 2004년 취임 때는 문제가 없었지만 그다음 해 공직자 재산등록현황 공개 때 위장전입 논란에 휩싸이면서 결국 사퇴했다.

◆'온고지신' 교훈도 절실

인사청문회의 개선점을 외국에서만 찾을 수 있을까? 우리 선조들의 인재등용관에 이미 답이 나와 있다. 요즘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딱' 들어맞는다.

백석대 김춘식 교수는 '퇴계의 사직소에 나타난 인재등용관' 논문을 통해 퇴계 이황이 왕에게 사직을 청하려 쓴 '무오사직소'(1558년)와 '무진사직소'(1568년)의 내용을 이렇게 분석한다. ▷고위공직자의 등용은 국가의 흥망을 좌우할 정도로 중요한 일이므로 인사검증을 철저히 해야 하고 ▷인사검증 과정에서 측근의 말만 믿어서는 안 된다. 여러 신하와 백성 모두에게 적합하다고 검증받은 인물을 다시 왕이 직접 검증하는 등 꼼꼼한 검증이 필요하며 ▷당사자도 자신의 능력과 자질이 부족하다고 판단되면 스스로 물러나는 등 '쌍방 검증'이 필요하다. 당사자만 알 수 있는 비리'비위는 용기를 내어 고백하지 않으면 밝혀지기 힘들고, 나중에 문제가 밝혀지면 자신은 물론 국가에도 피해를 끼친다.

황희진기자 hhj@msnet.co.kr

※인사청문회=대통령이 행정부 고위공직자 임명 시 국회의 검증을 받는 제도. 후보자가 직무 수행 능력 및 직무에 부합하는 도덕성을 갖추고 있는지 검증하는 것은 물론 국회가 대통령을 견제하는 하나의 장치로 평가받는다.

※인사청문회 대상

▷국회 임명동의안 표결이 꼭 필요한 직책

대법원장'헌법재판소장'국무총리'감사원장'대법관(대법원장을 제외한 13인)'헌법재판관(국회선출 3인)'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국회선출 3인)

▷국회 임명동의안 표결을 하지 않는 직책(헌법상 이들에 대한 임명은 대통령 고유 권한으로, 임명동의안 표결을 할 경우 위헌소지가 있다)

헌법재판관(대통령 임명 3인'대법원장 지명 3인)'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대통령 임명 3인'대법원장 지명 3인)'각 국무위원(장관)'국가정보원장'검찰총장'국세청장'경찰청장'방송통신위원장'공정거래위원장'금융위원장'국가인권위원장'합동참모의장'한국은행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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