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버스로 그리는 경북 스케치] <9>고집스런 삶의 길, 점촌∼김용사

이제부터 문경시 풍경…점촌시와 합쳐 한 살림 20년째 됐다네요

문경을 처음 찾는 외지인들은 혼란을 겪곤 한다. 문경의 도심은 문경읍이 아니라 점촌동이다. 1993년 문경군과 점촌시가 통'폐합돼 문경시로 이름이 바뀌면서 벌어진 일이다. 충북 괴산군과 인접한 문경읍은 문경온천과 문경새재가 있고, 관공서가 몰려 있는 점촌동은 상주시 함창읍, 예천군 용궁면과 가깝다. 문경의 시내버스 여행은 문경시내버스터미널에서 시작해야 한다.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차로 10분 거리이고 전통시장인 신흥시장과 맞닿아 있다.

◆산북면을 지나 김용사로

오전 10시 30분 문경시내버스터미널에서 운달산 김용사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운달산 입구까지는 50분이 조금 덜 걸린다. 주차장에서 김용사로 오르는 길은 너른 흙길이다. 눈 녹은 물이 콸콸 흐르는 운달계곡을 따라 전나무와 소나무, 잡목들이 우거진 고즈넉한 숲길을 걷는다. 홍하문을 지나 오른쪽으로 돌아 오르면 김용사의 전각들이 보인다.

김용사는 신라 진평왕 10년(588년)에 운달조사가 건립했고, 조선 인조 2년(1624년)에 중창됐다. 여러 차례 화마에 소실됐고, 1998년에는 대웅전을 제외한 불전 대부분이 불에 타기도 했다. 하지만 조계종 종정을 지냈던 성철과 서암, 서옹 스님 모두 이곳에서 수련했을 정도로 고승들이 많이 나온 절이다. 특히 성철 스님은 팔공산 성전암에서 수행을 마친 뒤 1965년 김용사에서 처음으로 설법을 시작했다.

불사는 대부분 새로 지어져 옛맛은 없다. 하지만 굽은 나무로 지은 불사와 담 밑에 아늑하게 몸을 숨긴 항아리가 운치 있다. 대웅전 뒤편으로 돌아가면 소박하게 쌓아올린 석탑과 불상도 만날 수 있다.

김용사에서 가장 토속적인 건물은 해우소(解憂所)다. 300년 전 모습 그대로를 간직한 보기 드문 장소다. 비탈에 지은 터라 앞에서 보면 1층이지만 뒤에서 보면 2층이다. 해우소 안으로 들어서면 낮은 나무 칸막이가 줄지어 있고, 마룻바닥에는 직사각형 구멍이 일렬로 뚫려 있다. 깊이가 2m는 됨직한 구멍 아래를 보니 아찔하다. 발이라도 헛디뎠다간 지옥을 맛볼 터다. 똥 위에 톱밥을 뿌린 덕분인지 생각보다 냄새가 심하지 않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크리스마스 이브

운달산 입구 정류장에서 10분 정도 가면 우곡리 정류장이다. 우곡교를 건너 갈림길에서 임도를 따라 2.5㎞가량 들어가면 산북면 석봉리 석달마을이다. 빨치산으로 몰려 학살된 아이들의 가슴 시린 흔적이 남아있는 장소다.

1949년 12월 24일 오후. 너무 추워 정신이 없을 정도로 한파가 매서웠던 날이었다. 종업식을 마친 열세 살 소년은 큰형(29), 사촌동생과 함께 발갛게 곱은 손을 비벼가며 산모퉁이를 돌았다. 정신없이 걷던 소년의 눈에 낯선 풍경이 들어왔다.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마을을 뒤덮은 연기. 서둘러 뛰는 소년 앞을 총을 든 군인들이 막아섰다. "이 동네 사냐?" "네…." "꿇어앉아. 가서 뒈져라." 손을 머리에 얹고 군인들에게 밀려 산비탈을 내려왔다. 무슨 일인지도 몰랐고, 무섭지도 않았다. 하지만 마을 앞 논은 이미 상상조차 못할 생지옥이었다. 포연과 총소리, 끔찍한 비명 소리와 함께 주인을 잃은 팔다리가 흩어졌다. 머리가 깨지고 여기저기 살점이 튀었다. 개울가에 숨은 아이를 끌어내 패대기를 치고 총으로 쏘기도 했다. 삶의 터전이었던 초가집과 싸리울타리는 활활 불에 탔다. "산 사람은 살려줄 테니 일어나라"는 말을 믿고 일어난 사람에게는 총알이 날아왔다. 정신이 아득해진 소년은 사촌동생과 끌어안고 눈물만 흘렸다. 그때 큰형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아니, 이유나 알고 죽읍시다. 왜 사람들을 다 죽이는 겁니까?" 하지만 돌아온 건 총알 세례였다. 목숨을 잃은 형은 소년 위로 쓰러졌고, 소년은 목숨을 건졌다. 몸이 불편한 할머니를 업고 있던 소년의 아버지도 할머니 시신 아래에서 살아남았다. 하지만 소년의 어머니와 할머니, 숙모 등 일가족 9명이 바로 그 자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팔이 날아갔던 외사촌 동생은 치료조차 받지 못한 채 1시간 뒤에 숨이 끊어졌다. 이날 마을 주민 127명 중 86명이 목숨을 잃었다. 희생자 중 60명이 노약자와 청소년이었고, 열 살도 되지 않은 어린이도 22명이나 됐다. 무고한 아이와 부녀자들에게 포탄과 총알을 퍼부은 이들은 공비를 토벌 중이던 국군 제2사단 2개 소대원 70여 명이었다. 어렵게 삶의 끈을 붙잡은 13세 소년은 팔순을 바라보는 노인이 됐다. 채의진(77) 씨. 그가 생생하게 기억하는 '문경 양민학살사건'의 전말이다.

◆ '해피엔딩'은 올까

채 씨와 함께 양민 학살 현장을 찾았다. 그곳에는 '문경양민학살어린이위령비'와 류춘도 시인의 헌시가 새겨진 '이름없는 아기혼들'이라는 시비가 있다. 시비 뒷면에는 말조차 못하던 아기들의 이름 '남애기' '김애기'가 새겨졌다. 깊은 상처는 낫더라도 흉터가 남는다. 채 씨가 총알 자국이 남아있는 바위 곁에 섰다.

"평생을 두고 어머니가 꿈에 나타났어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나타나 하소연을 해요.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한 것 같아요."

사건의 진실은 오랫동안 묻혀 있었다. 사건 직후 이승만 정부는 '무장게릴라에 의한 만행'이라며 진실을 덮었다. 유족들은 공포와 멸시 속에 피맺힌 절규를 가슴으로 삭혔다. 21년간 영어교사로 근무하던 채 씨는 민주화 바람이 불던 1986년 사표를 내고 본격적인 진실 규명에 나섰다. "진실을 밝히기 전에는 머리를 깎지 않겠다"고 다짐도 했다.

1990년대 미국 문서보관소에서 비밀 해제된 문건을 발견한 건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미군이 이 사건을 재조사해 한국군의 소행이라는 사실을 밝혀낸 문건을 찾아낸 것. 2007년 7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마을에서 환영받지 못한 데 분노한 국군이 무장공비에게 협력했다며 주민들을 학살한 것'이라고 진실을 규명했다. 채 씨도 허리까지 길렀던 머리를 잘랐다. 채 씨 등 유족들은 이듬해 7월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냈다. 그러나 1'2심 재판부는 손해배상청구권의 시효(5년)가 1954년 12월로 끝나 국가에 손해배상 책임이 없다고 판결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2011년 9월 상고심에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국가가 민간인 학살과 같은 반인륜 범죄를 저지르고도 배상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부당한 권리남용이라는 이유였다.

하지만 채 씨의 마음은 편치않다. 신원을 알 수 없었던 시신 38구가 가매장됐던 논은 유골 수습도 하기 전에 밭으로 변했다. 채 씨가 밭과 맞붙은 작은 바위굴로 이끌었다. 덩굴을 뜯어내고 들어가자 턱뼈와 다리뼈 등 뼛조각 20여 점과 다 타고 녹아내린 촛대가 보였다. 그가 밭에서 나온 뼈들을 수습해 임시로 안치한 것이다. 가해자에 대한 처벌 규정이 없는 '과거사 정리법'과 유족들 간의 갈등도 남아 있다. 채 씨의 목표는 제대로 된 위령사업을 하는 일이다. 국가에서 받은 배상비 중 일부는 2017년 한국에서 개최되는 국제 제노사이드 학회 비용으로 내놓기도 했다. 채 씨는 작년 위암 수술을 받았다면서도 아직 술을 끊지 못했다.

◆황고집이 만드는 고집스러운 술

산북면 우곡리 버스정류장에서 35분 정도 달리면 대하1리다. 이곳에서는 조선시대 황희 정승의 후손인 장수 황씨 종택과 후손들이 만드는 전통주 '호산춘'을 만날 수 있다. 늦은 오후, 양조장은 뒷정리에 한창이었다. 멋모르고 흙 묻은 신발로 들어가려다 혼이 났다. 술을 빚는데 잡균은 절대 금물이다.

호산춘은 시어머니와 며느리를 거쳐 내려온 전통가양주다. 황희 정승의 22대 종손인 황규욱(64'한국서예협회 경북지회장) 씨 부부가 전수받아 빚고 있다. 오랜 세월 전통을 놓치지 않고 내려온 비결은 뭘까.

"조선 말기까지 집안 살림이 괜찮았고, '접빈객'이라는 종가의 의무를 다했던 게 비결이겠죠. 쌀 한 되에 나오는 술이 한 됫박밖에 안 되는데 형편이 어려우면 어떻게 빚었겠어요?"

호산춘은 증류하지 않고 발효만으로 만드는 술임에도 도수가 18도로 높고 색이 투명하다.

황씨는 '황고집'으로 불린다. 지금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깨버린 술독만 수십 독이라고 했다. 1992년 김영삼 전 대통령 재임 시절 일화도 유명하다. 레이건 대통령이 방한했을 당시, 청와대로부터 호산춘을 만찬주로 쓸 터이니 보내라는 연락이 왔다. 그는 되레 "술을 쓸 사람이 와서 가져가라"고 대꾸했다. 결국 보좌관 수십 명이 내려와 일일이 술을 봉인해 가져가기도 했다.

경북문화재자료 236호인 장수 황씨 종택은 24시간, 365일 문이 열려 있다. 종택 안에는 수령이 400년을 넘은 탱자나무와 연리지도 볼 수 있다. "문을 닫아두니까 뭐가 있나 싶어서 도둑들이 끓어요. 놋그릇이건 현판이건 다 훔쳐가니까. 문을 열어두니 오히려 도둑이 없어요. 지금까지 이 집이 종중 재산이었다면 이제는 시민에게 돌려줘야죠."

글'사진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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