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대한민국호(號) 선장'을 맡은 박근혜 대통령은 "제2의 한강의 기적을 이룩하자"고 역설했다.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 주도했던 '한강의 기적'을 다시 달성해 대한민국을 선진국 반열에 확실하게 올려놓자는 것이다.
'한강의 기적'으로 대변되는 지난 50여 년에 걸친 대한민국의 발전상은 전 세계가 기적(Miracle)으로 평가하고 있다. 6'25전쟁이 끝난 후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67달러로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다. 그랬던 대한민국이 이제 1인당 국민소득(GNI)이 2만2천달러가 넘고 세계 10위권 경제력을 가진 국가로 성장했다. 다른 나라가 수백 년에 걸쳐 이룩한 근대화'산업화를 수십여 년의 짧은 기간에 성취했다는 것은 기적이란 말로도 수식할 수 없다.
◆대구에서 열린 경부고속도로 준공식
1955년 10월 한국을 돕기 위해 파견된 특별조사단인 '유엔한국재건위원회'(UNKRA)의 인도 대표 메논(Menon)은 한국을 두고 "쓰레기통에서 과연 장미꽃이 피는가"라고 평했다. 이 무렵 외국인의 눈에 비친 한국의 모습은 '쓰레기통'과도 같았던 것이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 저력(底力)을 지닌 대한민국은 쓰레기통을 탈출하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근대화'산업화를 통해 이 나라를 발전시키기 위한 대장정에 나선 것이다. 계속되는 경제개발계획으로 1960년대엔 경공업, 1970년대에는 중화학 공업이 비약적으로 발달했다. 새마을 운동을 통해 농촌의 근대화를 이루는 한편 전국을 일일 생활권으로 만드는 고속국도가 개통됐다.
1970년 7월 7일 대구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경부고속도로 최종 준공식은 그 험난했던 과정만큼이나 감동의 물결을 이뤘다. 경부고속도로의 설계자인 박정희 전 대통령도 감동에 겨워 눈물을 쏟아냈다. 야당을 비롯한 대다수가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반대했으나 박 전 대통령은 뚝심 있게 밀어붙였다. 경부고속도로는 우리나라의 산업과 국가 발전의 큰 축을 담당하면서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견인차 중 하나가 됐다.
이 경부고속도로 최종 준공식이 대구에서 열렸다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박 전 대통령을 비롯한 대한민국 근대화'산업화의 주역들이 대구경북 출신이란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주춧돌 놓다
대한민국 근대화'산업화에서 대구를 빼놓고 얘기할 수 없을 정도로 중추적 역할을 했다. 근대화'산업화의 방향을 제시한 것은 물론 대구를 비롯한 이 지역 출신 인재들이 하나로 뭉쳐 선진 대한민국의 주춧돌을 놓은 것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큰 그림을 그렸다면 대구경북 출신 인사들이 구체적 프로젝트를 짜고 실행하는 데 앞장을 섰다.
1954년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은 해방 이후 단일 공장 규모로는 대한민국 최고였던 제일모직 입지로 대구 침산동을 선택했다. 호암은 '호암자전' 회고를 통해 "창립 당시 무려 23만1천404㎡(7만 평)에 이르는 엄청난 크기로 계획됐던 제일모직의 입지를 어디로 할까 오랫동안 고심했다"고 털어놨다. 워낙 규모가 크고 선진국인 영국이나 할 수 있었던 모직 제조 사업을 한국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하니 고민이 깊을 수밖에 없었던 것. 이미 서울로 사업 근거지를 옮겼지만 삼성의 출발지인 대구 침산동을 제일모직의 입지로 택했다. 그 후 제일모직은 삼성그룹의 모기업이 되다시피 성장했고 삼성의 인재를 길러내는 '삼성사관학교'로 자리 잡았다.
제일모직을 비롯한 대구의 섬유는 대한민국의 자부심이었다. 1960년대만 해도 시골 중학교에서 대구 침산동에 있는 제일모직에 수학여행을 갈 정도였다. 수출 1억달러 시절에는 섬유가 단연 선두에 섰다.
◆신발끈을 다시 동여매며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까지 박정희 전 대통령은 6'25전쟁으로 붕괴된 산업기반을 재구축하고 경제를 살리기 위해 '중화학공업 육성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당시 박 전 대통령이 내린 지시는 '조국 근대화의 기수가 될 정예 기술인을 양성하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1970년대 공업고등학교 교실은 '조국근대화의 기수'를 양성, 배출하고 있다는 긍지와 자부심으로 충만했다. 제조업 현장은 이들의 기름 묻은 손에 의존했다. 이들을 통해 대한민국 산업화의 초석이 놓인 것이다.
경북대 전자공학과를 빼놓고서도 대한민국 산업화를 논할 수 없다. 매년 1천 명에 이르는 졸업생들은 좁게는 전자산업, 넓게는 대한민국의 산업을 성장시킨 주역으로 활약했다.
대한민국은 5천 년 절대빈곤의 농경사회를 마무리하고 지난 수십 년에 걸쳐 산업사회로 확실히 탈바꿈했다. '한강의 기적'의 저변에는 어린 나이에 공장에서 땀을 흘린 현재 60세를 넘은 기성세대의 노력이 스며들어 있다. "우리도 하면 된다"는 도전 의식과 진취적 기상이 대한민국의 오늘을 낳았다. 그 중심에 바로 대구가 있었다.
이대현기자 sk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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