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한 호프집에는 "지나친 과음은 고맙습니다."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나는 주인의 재치 있는 말을 아주 즐겁고 유쾌하게 생각하는데, 어떤 국어 선생들은 이 상황을 편하게만 보지 못한다. 그들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은 전체적은 맥락과 의미보다 '지나친 과음'이라는 부분이다. '과음(過飮)'이라는 말이 지나치게 마신다는 뜻인데, 거기에 '지나친'을 쓰는 것은 잉여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잉여 표현이 있으면 모두 잘못된 표현인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역전(驛前) 앞 다방'을 '역전 다방'으로 고치는 것은 수긍할 수 있다. 그런데 '과반수(過半數)를 넘었다.'를 '과반수이다.'나 '반수를 넘었다.'고 표현하라고 하면 조금 어색하다. '박수(拍手)를 치다.'의 경우 '박(拍)'에 '치다.'라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이것도 일종의 잉여 표현이다. 그렇다고 잉여 표현을 없애기 위해 '손을 치다.', '박수를 하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더 이상한 일이다. 이처럼 언어 규범이라는 것은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쓰고, 그것이 의사소통에 큰 문제를 야기하지 않는다면, 혹은 상황을 더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말이라면 시대에 맞게 바뀔 수가 있다.
한편으로는 호프집 주인이 이런저런 규범들을 의식했다면 그와 같은 재치 있는 표현이 나왔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이건'이영돈의 먹거리 X파일'이나 '불만 제로'와 같은 프로그램을 열심히 본 사람에게 먹을거리가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10여 년 전 연수를 받을 때 한 강사가 "밀크셰이크를 밀크쉐이크로 쓰는 사람을 보면 칼로 찌르고 싶다"라고 한 말은 지금도 분명히 기억난다. 그 삭막한 표현은 섬뜩하기 그지없었다.(솔직히 칼 맞을까 걱정도 되었다.) 그 강사의 말은 규범에는 맞을지 몰라도 결코 호프집 주인의 표현에는 미치지 못한다. 어릴 적 동네 아지매들은 이런 대화들을 자주 하셨다.
"도개 들이 넓다고 도개로 시집 왔는데, 와 보이 깨알 하나 모로 심을 땅도 내 땅은 없더라."
"하이고 형님네는 다리못골 논이라도 있지, 우리는 빈대 새끼 무릎 꿇고 기도할 땅도 없었어요."
내용을 보면 굉장히 슬프고 힘겨운 생활이 들어 있는데, 전혀 슬프게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웃음이 난다. 그런 상황에서 황당한 과장법을 쓸 수 있다는 자체가 삶을 긍정적으로 보는 마음과 여유로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말을 들으면 듣는 사람도 기분이 좋아진다. 이런 표현이 가능한 것은 언어규범이나 논리를 잘 배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생활에서 우러나오는 직관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말을 통해 인간관계가 이루어지는 일상생활에서 바른 말 고운 말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재미있는 말들이 아닐까 한다.
-'성병휘의 교열斷想'이 지난주로 막을 내리고 4월부터는 무심하게 지나쳐버리는 우리말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 전하는 '민송기의 우리말 이야기'를 싣습니다. 민송기는 서울대 국어교육과를 나와 현재 대구 능인고 교사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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