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봄 햇살 좋다, 그치?"
허윤희(가명'29'여) 씨는 어머니 류혜옥(가명'54'여) 씨를 휠체어에 태워 거실 창문 앞으로 밀고 갔다. 류 씨는 뇌병변 1급 장애로 걸을 수 없어 가끔 딸과 함께 창문을 통해 밖을 보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하루 중 유일한 즐거움이다.
"응, 따뜻하구나." 류 씨는 딸을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딸 윤희 씨는 웃는 어머니의 입에 앞니가 없어 구멍처럼 뻥 뚫려 있는 모습을 보자 눈물이 돌았다. 그러나 웃는 어머니 앞에서 차마 울 수 없어 애써 더 활짝 웃었다.
◆어머니의 멍
윤희 씨는 6살 때 어머니의 몸에 난 멍을 처음 보았다. 멍이 생긴 이유가 아버지의 폭력 때문이라는 걸 안 것도 그때쯤이었다.
아버지는 술을 먹고 들어올 때마다 어머니를 때렸다. 윤희 씨는 보다못해 경찰에 아버지를 신고하려고 했던 적도 있었다. 112에 전화를 걸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머니를 때리는 아버지가 너무 무서웠지만 그냥 뒀다간 무슨 일이 나겠다 싶었어요. 제 방에서 부들부들 떨면서 112에 전화했지만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리고 있어요'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어요. 그렇게 두어 번 전화했더니 이상하게 여긴 경찰이 집으로 찾아와 상황을 마무리 지어 줬어요."
그 시절 윤희 씨가 기댈 곳은 공부밖에 없었다. 중학교 때 과학고나 외국어고를 준비할 정도로 성적이 좋았지만 경찰에 아버지를 신고하려 했던 그날 윤희 씨는 일반계 고등학교 진학을 결심했다. 어머니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결국 2004년 어머니는 이혼을 했다. 아버지를 따라간 남동생을 통해 간간이 아버지 소식을 듣기는 하지만 직접 연락을 하지는 않는다.
"아버지가 잘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나도 모르게 화가 나요. 어머니는 이렇게 아픈데, 어머니가 입원했을 때에도 어머니를 괴롭혔는데, 혼자 잘살고 있으니까요. 어머니의 멍을 볼 때마다 더더욱 아버지를 원망하게 됩니다."
◆교통사고와 부러진 앞니
어머니는 2003년 10월, 비가 많이 오던 날 밤 교통사고를 당했다. 윤희 씨가 서울의 명문대 수시에 1차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어머니가 딸의 대학 합격 소식을 듣고 친한 동네 이웃들에게 집 근처 식당에서 한턱을 내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어머니는 그때 온몸을 다치셨고, 병원에서는 '길어야 6개월'이라고 할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았었죠. 살아나시긴 했지만 결국 뇌병변 1급 장애 판정을 받고 평생 일어날 수 없게 됐어요."
윤희 씨는 어머니가 교통사고를 당한 줄은 알았지만 상태가 이렇게 심각한지는 수능이 끝난 뒤에야 알 수 있었다. 수능 준비하는데 방해될까봐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윤희 씨는 서울로의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대구지역의 한 대학에 입학했다. 비싼 등록금도 문제였지만 어머니를 돌볼 수 있는 사람이 자신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병세가 호전되기 시작하면서 윤희 씨는 더 전문적인 치료를 위해 경북 문경에 있는 한 장애인 재활시설에 어머니를 맡겼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걷는 연습을 하다가 넘어져 앞니 4개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어머니의 사고 소식에 깜짝 놀란 윤희 씨는 부랴부랴 자신이 다니는 대학교 근처에 집을 얻어 어머니를 모셔왔고 집 근처의 요양병원을 오가며 재활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올 2월에 걷는 연습을 하다 또 앞으로 넘어지면서 치료해 놓은 앞니가 다시 부러져버렸다. 그래서 앞니가 있어야 할 자리는 구멍처럼 뻥 뚫려 있고, 입가에 멍도 들었다.
"치과에서는 이미 치료했던 앞니가 점점 약해지고 있어서 부러질 수밖에 없었대요. 문짝 떨어진 대문처럼 빠져 버린 앞니를 볼 때마다 제가 제대로 어머니를 모시지 못한 것 같아 너무 속상해요."
◆"엄마, 더 나빠지면 안 돼."
윤희 씨는 어머니의 몸이 갈수록 더 나빠져 마음이 아프다. 10년간 투병생활을 한 탓에 뇌병변으로 인한 장애뿐 아니라 합병증도 계속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3년 전에는 간과 췌장이 나빠지기 시작하더니 2년 전부터는 왼쪽 귀까지 들리지 않게 됐다. 지난해에는 당뇨병 진단도 받았다.
"병원에 다니면서 물리치료와 약 처방을 받지만 이건 병을 낫게 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더 나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예요. 여기서 더 나빠지면 어머니가 너무 힘들잖아요."
윤희 씨는 생활비와 어머니의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대학을 졸업했지만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있는데다 이혼하면서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위자료를 한 푼도 주지 않아 어머니에게 남아있는 돈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윤희 씨는 "졸업 전엔 과외 아르바이트로 번 돈과 집을 담보로 대출해 겨우 대학 등록금과 생활비를 메웠는데 이젠 그마저도 할 수 없는 상태"라고 했다.
윤희 씨는 기초생활수급대상자에게 지급되는 보조금 40만원과 윤희 씨의 사연을 아는 친구들이 십시일반 도와주는 돈으로 하루하루 겨우 버티고 있다.
집 안으로 쏟아지는 봄 햇살을 맞으며 윤희 씨는 어머니의 팔과 어깨를 주물러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윤희 씨는 어머니가 자신을 많이 사랑하고 의지한다는 걸 알게 된다.
"어머니는 끔찍할 만큼 힘든 시간을 저와 제 남동생 때문에 견디셨다고 말하시더라구요. 힘든 일이 있을 때도 혹시나 저와 제 남동생이 잘못될까봐 꾹 참으셨대요. 그런 말씀 하실 때마다 제가 어머니를 더 잘 모셔야겠다고 다짐합니다. 하지만 제 능력이 부족해 그렇게 하지 못해 늘 미안해요."
이화섭기자 lhsskf@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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