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네 살에 만난 도자기는 그저 먹고살기 위한 그릇이자 도구였다.
흙과 장작을 지게에 지고 나르던 그는 하얀 이밥을 먹고 싶어 도자기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고, 어느새 그릇은 그를 일본인들이 환장하는 '이도다완(井戶茶碗)을 재현해 낸 마지막 조선 도공'으로 만들었다.
사람이 그릇을 만들어냈다면 그 그릇이 사람을 만들어 보답한 것이다.
올해로 도예 인생 67년. 팔순에 이른 천한봉 선생은 요즘도 물레질을 쉬지 않는다.
"습관성이라는 것이 있다. 올해로 80이 넘었지만, 나만치 하는 사람이 없다. 옛날부터 이런 식으로 생활해왔기 때문에 보통이다. 건강하다. 요즘 들어 생각하는 것이 사람이 흙을 만지면서 사는 것이 건강의 비결인 것 같다."
경북 문경시 문경읍 당포리에 자리 잡은 도천자기미술관에서 만난 그는 '소년처럼' 미소를 지었다. 먹고살기 위해 도자기 공장에 취직해야 했던 '소년가장'이 조선도공이 되기까지의 연륜이 그의 담백한 미소에 담겨 있는 듯했다.
그가 빚어내는 찻사발(茶碗)은 조선 막사발처럼 소박하고 투박하면서도 담백하고 깨끗하다. 그릇은 자신을 빚어낸 사람과 닮는다. 천한봉 선생의 그릇도 그와 닮았다.
간장 종지와 접시, 탕 그릇과 화분을 만들어내는 도자기 공장의 최고기술자이기는 했지만 평범한 도공에 불과했던 그를 '조선 도공'의 길로 인도해준 것은 조선 막사발 한 점이었다.
문경에서 요업사를 하면서 화분을 만들어 팔던 그에게는 일본 교토의 대각사 주지였던 사쿠라가와가 찾아왔다.
"그 사람이 우연히 문경요에 찾아와서 내가 일하는 것을 보더니 '당신이 이렇게 좋은 기술을 갖고 있는데 이런 것을 한 번 만들어봐라'며 바랑에서 책을 한 권 꺼내서 보여줬는데 '이도다완'에 대한 책이었다. 그는 이것이 임진왜란 때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일본의) 국보라며 이것만 만들면 돈도 벌 수 있고 성공할 수 있다며 책을 주고 갔다."
천한봉 선생은 이때부터 책 속의 그릇과 똑같은 것을 만들기 위해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 다행히도 그는 일본에서 태어나 소학교(초등학교)까지 다닌 덕분에 일본어에 익숙했다.
책 속의 '이도다완'은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남해안에서 약탈해 간 우리나라의 사발 그릇인데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일본의 국보 28호로 지정됐다.
그는 "국보(國寶)라면 모름지기 나라의 보물인데 조선의 이름없는 무명도공이 만들어서 사용하던 막사발을 가져가서 국보로 지정할 정도면 보통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해서 우리나라 도공이라면 누군가는 재현해야 한다는 그런 사명감 같은 것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제 '이도다완'을 재현해 낸 '마지막 조선도공'이라는 명예를 지키는 것을 마지막 목표로 삼고 있다.
"초창기에 고생할 때를 생각하면 이것을 누구한테 물려줄 필요가 있느냐, 이렇게 고생스러운데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죽기 전에는 내 기술을 모두 전수하고 죽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많은 사람에게 다는 못 가르치지만 내 자식한테는 다 가르치고 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14세에 도자기에 취직한 이야기를 화두로 꺼냈다. 그러자 손을 내저으면서 그는 말도 못할 고생을 하나씩 풀어냈다.
"도자기 공장에 품이라도 팔려고 들어갔는데 할 줄을 아는 게 뭐가 있겠느냐. 어른들이 시키는 것만 했지.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당시나 지금이나 남에게 잘 가르쳐주지 않아. (도자기) 기술자는 월급도 많이 받고 유세도 대단했다. 그래서 배우려고 했다. 안 가르쳐주니까 남들 퇴근한 이후 어깨너머로 배운 것을 호롱불을 켜놓고 몰래 실습하곤 했다."
그런데 도자기를 빚을 줄 아는 것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 소년 천한봉은 그래서 꾀를 냈다. 마침 점심때였는데 기술자들에게는 '하얀 이밥'을 주는데 허드렛일을 하는 일꾼들에게는 밥을 주지 않았다.
기술자들이 모여서 점심을 먹는 자리에 가서 소년은 제안했다. "어르신들, 도자기 만드는 것이 뭐가 그리 대단한 기술이라고 유세를 하는가. 그 하얀 이밥 한술 먹어보라고도 하지 않느냐. 어찌 그리 인심이 고약한가."
그러자 양근택이라는 기술자가 나서 "네까짓 꼬마 녀석이 건방지게 그러느냐. 여기 와서 도자기 한 번 만들어 봐라"고 제안했고 그러면서 도자기공장 주인에게 간장 종지라도 하나 만들어내면 기술자들 옆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청했다.
막상 어른들이 쓰는 발 물레 앞에 서자 그는 진땀이 났다.
"키가 작으니까 바짝 매달려서 만드는데 도자기를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하면 쫓겨나야 하니까 진땀이 날 수밖에 없지…우여곡절 끝에 도자기를 딱 만들어내니까 그 기술자 어른이 '세상이 이런 천재가 어디 있느냐'며 무르팍을 탁 쳤다."
그때부터 그는 기술자 옆에서 도자기 만드는 일을 도우면서 본격적으로 기술을 배웠고 18세가 되자 문경에서는 최고의 기술자가 됐다. 다른 기술자가 하루에 400개의 접시를 만들면 그는 800개를 만들어냈다. '잔그릇 대장'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때는 그릇 만드는 기술자였지 도예는 전혀 몰랐다고 할 수 있지 않느냐.
"예술이니 문화니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우선 돈을 벌어서 먹고살아야 했다. 나도 모르고 다른 사람도 모르는 사이에 최고의 기술자가 되기는 했다. 여러 도자기 공장에 스카우트돼서 이름을 날렸다. 그렇게 남의 공장을 전전하면서 20여 년간 기술자 노릇을 하다가 관음리 털목고개의 청기와공장을 인수, 조령요업사를 차려서 (사기) 화분을 만들어서 팔았다. 그러다가 한 고고학자가 조선사발을 만들어내면 잘 팔린다고 해서 막사발을 만들어 팔았다. 하도 잘 팔려서 부자가 되는 줄 알았다."
- 결국, 일본의 이도다완을 만난 후 도예의 길로 들어선 것인가.
"교토 대각사의 사쿠라가와 주지가 찾아와서 이도다완에 대한 책을 주고 이것을 만들어보라고 해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책을 보니까. 사진 속의 찻사발은 전부 남쪽지방인 진주와 하동, 김해와 웅천 지방에서 생산됐다. 그러면 틀림없이 이것을 만들려면 그쪽 지방에 가서 흙을 가져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문경 흙은 '땐땐이'가 지기 때문에 자황이 되지 않는다. 자황(찻사발)은 찻물이 배어서 소박한 아름다움이 나와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천상 그쪽 지방 흙을 가져와서 섞으면 될 것 같았다. 그쪽 흙을 가져와서 섞어서 만드니까 기가 막힌 그릇이 나왔다. 요즘에는 문경에서 다 그렇게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사쿠라가와 주지가 다녀간 다음 해인 1974년 일본에 가서 1년 동안 공부를 했다. 일본에 가서 직접 '이도다완'을 만나고 교토를 비롯한 일본의 유명한 찻그릇은 모두 찾아 나섰다. 일본의 도자기 공장도 다 돌아봤다. 그리고 귀국해서 이도다완 재현에 성공한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어떤 차를 마셨는지 어떤 찻그릇이 있었는지에 대한 문헌이나 기록이 없었다. 공부를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본에 갔다"
-평생을 업으로 삼고 있는 도자기와 도예는 천한봉 선생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제가 왜 이것을 안 놓치고 오늘날까지 이 업을 하느냐면 다른 나라 사람들이 우리의 도예문화를 국보로 만들었다면 보통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재현해야 한다는 사명감에서, 또 이것만 재현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집념으로 하다 보니까 어느새 60년이 지나버렸다. 일본인들이 와서 내가 만든 다완을 두 손으로 만져보고 환장하는 것을 보니까 틀림없이 누군가는 재현해서 빛을 봐야 한다는 그런 각오도 생겼다."
-일본왕실 화병을 전통방식으로 만들어줘서 화제에 올랐고 후에 일본정부로부터 훈장도 받았다.
"그 화병은 분청으로 분을 입히고 구워내 사용하면서 서민적인 소박성이 생긴다. 그런 것을 일본사람들이 좋아하는데 원래 그렇게 주문이 들어왔다. 우리나라하고는 완전히 다르다. 일본왕실 화병은 일본사람들의 아이디어였지만 한국의 흙으로 제일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한국사람밖에 없다고 여겨서 나한테 주문한 것이다. 일본 정부 훈장은 그일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전시회를 하는 등 여러 가지 활동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완의 바닥인 굽에 1~4개의 홈이 있다. 어떤 예술적 의미가 있는가.
"(웃으면서) 일본사람들도 여기에 대해 잘 모른다. 다완의 굽에 대해 일본사람들은 '와리고다이'니 '기리고다이'니 하며 여러 표현을 하면서 예술적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미적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옛날 사람들은 이 도자기를 만들어서 지게에 지고 다니면서 팔았는데 그때 지게에 딱 걸리도록 포장을 하기 위한 용도로 그릇에 홈을 판 것이다. 옛날에는 도자기를 짚으로 쌌는데 10개 단위로 묶을 때 홈이 없으면 걸리지가 않는다. 이 도부장사들이 공장에 포장할 수 있도록 주문한 것이 오늘날의 굽에 홈을 넣게 된 기원이다. 그런 역사의 뿌리가 남아 있어서 지금도 다완을 만들 때 굽에 홈을 내는 것인데 일본사람들이 이렇게 설명하면 깜짝 놀란다…."
◆도천가(陶泉家)
천한봉 선생의 문하에는 40여 명의 제자가 '도천가'(陶泉家)를 이루고 있다. 딸 천경희(41) 씨는 수제자이자 무형문화재 전수자다. 10년이 지난 '문경찻사발 축제'도 그가 회장을 맡아서 시작됐다.
그는 문하생과 제자들에게 "도자기라는 것은 누구든지 성의만 있으면 모두 할 수 있다. 집념과 애착심이 있으면 다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도자기라는 것은 인간성이 제일 중요하다"라고 강조하면서 "내 밑에서 기술을 배우려면 천한봉의 인간성을 공부해라. 항상 내 곁을 떠나지 마라. 내가 일일이 시킬 수 없고 너는 눈으로 보고 배워라"고 말한다.
제대로 된 도자기는 도자기를 만드는 인간성에 따라 완성된다는 말이다. 기술보다 인간성을 더 강조하는 이유다. 같은 제자라도 성격에 따라 작품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는 수제자 천경희 씨에 대해 "원래 대학에서 디자인 공부를 했으니까 오히려 디자인에서는 나보다 낫다"며 "미래적인 차원에서 발전적"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천경희 씨는 "아버지가 전통을 고수한다면 저는 조금 (거기에서) 벗어나서 재료와 방식은 그대로지만 디자인 쪽에서 현대적인 변화를 주는 등 조금씩 다른 형태를 추구하고 있다"며 전통다완과 잘 어울리는 자신이 빚은 차 받침과 차도구들을 선보였다. 천경희 씨는 그동안의 '부녀전시회'에서 벗어나 요청을 받은 일본 교토 노무라 미술관 전시회 준비를 위한 작품활동에 요즘 정신이 없다.
서울정경부장 diderot@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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