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으로서의 공동체, 사람들이 일대일 관계의 가치와 그런 관계의 한계를 모두 실현해내는 과정으로서의 공동체를 생각하고 싶다. 빈민이나 주변적 인간들에게 그 한계는 정치적 한계이고 경제적 한계이다. 가치는 사회적 가치이다. 공동체가 비록 삶의 전부를 채워주지는 못하지만, 최소한 진지한 즐거움을 약속해주기는 한다.(리처드 세넷의 '투게더-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 중에서)
지난주 '질문을 공유한 공동체'와 관련된 글이 나가고 제법 많은 전화를 받았다. 보잘것없는 낙서를 읽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부끄럽고도 고마웠다. '뭐야? 좋은 말 같은데, 그게 뭔데?' '질문을 공유하는 건 자유로운 개인에서나 가능하지 조직에서는 불가능할 텐데? 학교도 조직이잖아.' 대부분 이와 비슷한 내용이었는데 질문에 대한 내 답변은 대체로 '내 표현 능력의 부족이야. 있는 그대로 이해해줬으면 한다'에 그쳤다.
사실 '질문을 공유한 공동체'는 오래전부터 내가 꿈꾸었고, 지금도 꿈꾸고 있고, 앞으로도 꿈꾸고 있는 사회이다. 사실 장학사가 되지 않았다면 나는 그와 유사한 교육 공동체를 만들어 생활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에서 학교 수준의 교육과정을 꾸리는 것은 쉽지 않다. 학교 수준의 자율적인 교육과정을 꾸릴 만한 교육과정 현장 전문가도 부족할뿐더러 교육과정을 운영할 수 있는 다양한 교육 자원도 아직은 부족한 편이다. '2009 개정 교육과정'이 여전히 교육부의 지침을 형식적으로 수용하는 선에 머물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사실 우리가 관심을 둬야 할 부분은 학교 수준의 교육과정을 넘어 지역 수준의 교육과정을 만드는 일이다. 지역, 특히 마을이 중심이 되는 열린 교육과정 말이다. 그 일을 실천하고 싶었다. 지난날, 선생님들과 팀을 꾸리고 학교에서 학부모 교육을 하면서 그들을 교육 주체로 유도하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때의 느낌이 그대로 이어져 지금 토론학부모지원단, 책쓰기학부모지원단을 운영하는 바탕이 되기도 했다.
공동체의 사전적 정의는 '사람들이 모여 하나의 유기체를 이루고 목표나 삶을 공유하면서 공존할 때 그 조직을 일컬으며, 단순한 결속보다는 질적으로 더 강하고 깊은 관계를 형성하는 조직'이다. 공동체는 상호의무감, 정서적 유대, 공동의 이해관계와 공유된 이해력을 바탕으로 한 사회적 관계망을 핵심 내용으로 한다. 결국 공동체를 말하는 순간, 이미 일정 부분의 일체성과 동질성을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일체성과 동질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공동체는 스스로 붕괴하거나 공동체가 구성원들을 억압하는 상황이 나타나기도 한다. 결국 공동체를 유지해가는 가장 중요한 조건은 바로 차이에 대한 인식이다. 차이를 인식하지 않는 공동체가 '해답을 공유한 공동체'다.
하지만 구성원들의 차이를 인식하고 오히려 그 차이를 중시하는 것이 '질문을 공유한 공동체'다. '질문'은 현재에 대한 분석을 통해 나타난 의문이며, 공동체가 공유하는 문제의식이다. '해답'을 공유할 때 갈등이 없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구성원들 사이에도 소통 부재에 따른 갈등이 나타나겠지만 구성원을 넘어선 다른 공동체와 만나기는 특히 어렵다.
'질문의 공유'는 과정이나 방법의 차이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거기에 아주 다양한 '해답'이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된다. 현재 우리 교육의 가장 대표적인 논쟁은 '경쟁이냐? 협력이냐?' 하는 의문이다. '경쟁이 중요하다' 또는 '협력이 중요하다'는 해답은 서로 만나기가 어렵다. 하지만 '경쟁이냐? 협력이냐?' 하는 질문은 여전히 현재적 의미를 지니다. 경쟁과 협력이 대립적인 개념이라기보다 상보적인 의미를 지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준희 대구시교육청 장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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