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침체, 그리고 고용불안…. 하루하루 서로 안부를 묻고 살 수밖에 없다. 얇은 지갑 때문에 가족 앞에서도 왜소해지기만 한다. 1천800만 명에 달하는 대한민국 직장인들의 모습이다. 이렇게 기가 죽었던 직장인들의 답답한 마음이 뚫리고 있다. TV 드라마와 영화, 웹툰 등 대중문화 콘텐츠가 현실에 있을 법한 직장인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어서다.
◆안방극장서 맹활약
직장인들이 안방극장을 접수했다. 샐러리맨의 애환을 담아낸 '직장의 신'(KBS2), '무한도전'(MBC)의 '무한상사'가 깊은 공감대를 얻고 있다. 드라마 속 직장인들을 보며 시청자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눈물을 흘린다. 올 초 방영된 SBS '청담동 앨리스'와 KBS2 '학교 2013'의 여주인공은 각각 의류회사 계약직과 비정규직 기간제 교사로 계약직 직장인들이 겪는 일화를 그려 인기를 누렸다. 노처녀 캐릭터 '영애'를 중심으로 직장 사무실을 그려낸 케이블방송 드라마 '막돼먹은 영애씨'는 오는 7월 시즌 12를 방영한다. 7년간 시즌을 이어온 이 드라마는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뮤지컬로도 만들어졌다.
그동안 직장인들을 소재로 한 드라마는 많았다. 그러나 지금까지 드라마'영화'만화 속 직장은 현실과 동떨어진 경우가 많았다. 재벌 2세와 '신데렐라'가 연애하거나 각종 음모와 협잡이 난무하는 등 과장되고 비현실적인 직장의 모습이었다. 막장 드라마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드라마에서는 '레알' 직장인들이 등장하거나 비정규직'정리해고 등 사회문제를 과감하게 내비치면서 공감을 얻고 있다. 카타르시스와 감동도 있다.
'직장의 신'의 주인공 미스김은 그야말로 제목처럼 '직장의 신'이다. 굴삭기 운전, 정비사, 조산사, 수많은 외국어 능력까지…. 100개가 넘는 자격증으로 중무장(?)했다. 절대 해낼 수 없는 일들을 척척 해내는 반면 직장인이라면 당연히 지녀야 할 아부와 처세술을 온몸으로 거부해 회사 내 계급체계를 통째로 뒤흔든다. '당연히 회사를 위해'라는 인식은 미스김의 '제 업무가 아닙니다만'이라는 한마디에 깨진다. 오후 6시 '칼퇴근'과 회식 거부를 마음으로만 꿈꿨던 직장인들에게 미스김의 언행은 카타르시스 그 자체다. '무한상사'의 정 과장도 마찬가지. 정리해고의 피바람 속에서 겪는 직장인들의 갈등과 냉엄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그리는가 하면 정 과장의 퇴사를 아쉬워하는 동료들의 안타까움이 표현돼 시청자들에게 웃음만이 아닌 감동을 선사했다.
◆스크린 장악
같이 일하기 싫은 동료 1위는?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직장 내 아부의 왕'을 손꼽는다. 그러나 아부의 왕이 스크린에서만큼은 왕 대접을 받는다. 지난해 직장 내 처세술과 에피소드 등을 다룬 '아부의 왕' '회사원' 등이 개봉된 데 이어 올 들어 '전설의 주먹' '연애의 온도' 등 직장을 배경으로 한 영화가 쏟아지고 있다.
'아부의 왕'은 직장인들의 원활한 사회생활을 위한 아부의 팁과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이야기를 풀어냄으로써 큰 웃음을 선사했다. 소지섭 주연의 영화 '회사원'도 얼핏 조폭 영화 같지만 결국은 직장인들의 생리를 다룬 영화로 분류된다. 살인청부회사 영업과장인 주인공 지형도가 첫사랑 여인 미연을 만난 뒤 평범한 일상을 꿈꾸기 시작하면서 겪는 이야기. 그러나 회사원들에게 필수 지침서가 될 만한 내용이 가득 담겨 있다. '내가 너 예뻐하는 거 알지?'라는 상사의 말 한마디에 깍듯이 인사를 하며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를 외치는 주인공의 모습에 많은 회사원들이 공감했다.
지난달 개봉한 '전설의 주먹' 역시 직장인들의 애환이 녹아 있다. 주인공 이상훈은 기업 홍보 담당자였지만 고교 동기인 회장의 단순한 호기심에 옛친구와 함께 링에 올라야 한다. 그러나 용기 있게 싸움을 거부하며 진정한 '갑'으로 변신에 성공한다.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연애의 온도' 역시 은행이 주무대다.
2006년 나온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영화도 최근 '다시 보고 싶은 영화'로 손꼽힌다. 한 여성의 직장 생활 살아남기를 그린 신입사원 스토리가 직장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웹툰에서도 직장인 슈퍼스타가 활동하고 있다. '미생'은 바둑 프로기사를 꿈꾸던 주인공 '장그래'가 입단에 실패하고 회사에 비정규직으로 취직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지난해 1월부터 인터넷 포털사이트 다음 '만화속 세상'에 연재되면서 직장인들에게 호응을 얻고 있다. 올해는 이 웹툰이 모바일 단편 영화로 제작될 예정이다.
영화평론가인 조희문 중앙대 연극영화과 교수는 "직장인 소재의 영화가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은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보여주며 삶을 치유해주기 때문이다. 수많은 직장인들은 생존에 대한 불안과 비애를 느낀다. 이들 영화는 그들의 아픈 곳을 어루만져주고 대리만족을 주며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비정규직, 정리해고 등에 공감
'누구나 한때는 자기가 크리스마스트리인 줄 알 때가 있다. 하지만 곧 자기는 그 트리를 밝히는 수많은 전구 중 하나였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머지않아 더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된다. 그 하찮은 전구에도 급이 있다는 것을.'(드라마 '직장의 신' 중 계약직의 애환을 비유한 정주리의 내레이션) 다소 과장되고 작위적인 설정 속에서도 직장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나 영화가 시청자들을 사로잡는 것은 정리해고, 비정규직, 스트레스 등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경험했거나 경험할 수 있는 쓰디쓴 상처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직장의 신'은 비정규직 문제와 명예퇴직 등 그동안 드라마에서 소홀히 했던 사회적 문제들을 정면으로 다뤄 공감을 얻고 있다. 시간 외 근무로 건당 수십만원씩 챙기는 '미스김'은 판타지에 가까운 캐릭터이지만,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를 통해 비정규직의 애환을 날카로운 풍자로 꼬집는다는 점에서 결코 가볍지 않은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올해 초 방영된 SBS '청담동 앨리스'와 KBS2 '학교 2013'의 여주인공은 비정규직이 직장에서 겪을 수 있는 차별을 간접적으로 보여줬다.
이 같은 현상은 우리 사회의 현실이 반영된 결과라는 분석이다. 무한경쟁을 강요하는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가 뿌리를 내리고 저임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이 늘어나면서 갈수록 악화되고 있는 노동환경을 대중문화가 더 이상 외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윤병철 대구가톨릭대 사회학과 교수는 "드라마는 현실을 반영한다. 직장 환경이 시대에 따라 크게 변했다. 비정규직 도입 등으로 고용 유연성이 커진 반면 고용불안 요소도 크게 증가했다. 그동안 안정적이었던 직장에서 다양한 문제점들이 발생하고 있다. 생존 위협에 노출된 직장인들의 불안한 삶이 대중문화에 반영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따끔한 지적도 있다. 강부환 변호사는 "최근 등장하는 드라마들이 비정규직의 삶을 많이 다루고 있다. 하지만 비정규직이 왜 양산되고 있는지 구조적인 문제를 전혀 짚어주지 못하고 있다. 이런 설명이 없는 상태에서 이를 단순히 여주인공의 처지나 로맨스 등 극적 장치로만 활용하는 건 조심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비정규직에게 오히려 상처를 줄 수 있다"고 했다.
최창희기자 cchee@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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