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유럽인들은 심해에 '크라켄'(Kraken)이라는 괴물이 살고 있다고 믿었다. 전설에 따르면 크라켄은 몸 둘레가 2.5㎞에 달한다. 이 괴물이 등장할 때면 산만 한 파도가 몰아쳤다. 괴물이 내뿜는 먹물은 바다를 온통 검은빛으로 물들였고 기둥 같은 촉수에 휘감긴 범선들은 풍비박산 나서 침몰했다.
유럽인들이 크라켄의 존재를 믿은 원인을 제공한 것 중 하나는 향유고래이다. 몸길이 20m에 무게가 50t인 이 거대 고래의 사체가 간혹 해변에 떠밀려오는데 피부에 수많은 빨판 자국과 긁힌 상처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향유고래를 죽일 수 있는 것은 크라켄뿐이라고 유럽인들은 생각했다. 그러나 향유고래 피부의 상처는 대왕오징어 때문에 생긴 것이다. 향유고래는 수심 2천m까지 잠수해 대왕오징어를 사냥하는데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대왕오징어가 몸부림치는 과정에서 상처가 나는 것이다.
향유고래는 이빨 달린 동물 중에 가장 크다. 큰 덩치답게 엄청난 에너지를 소비한다. 그런데 향유고래만큼 에너지를 펑펑 쓰는 종(種)이 있다. 다름 아닌 '인간'이다. 작가 존 라이언은 1999년 지은 책 '지구를 살리는 7가지 불가사의한 물건들'에서 미국인들이 사용하는 에너지 총량과 사향고래(향유고래)의 그것이 맞먹는다고 했다.
라이언은 '깨끗한 지구' '지속 가능한 삶'이라는 명제 아래에서 미국의 소비 문화'방식이 롤 모델이 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책은 달라이 라마가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에게 던진 화두를 소개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이 자동차를 운전한다면 지구는 어떻게 될까요?"
성장의 신화를 먹고사는 자본주의는 페달을 밟지 않으면 쓰러지는 자전거와 같다. 화석연료를 기반으로 하는 '현대 문명의 성장률=에너지 소비량'이다. 에너지 소비가 매년 3% 늘면 24년 후 필요한 에너지양은 두 배로 늘어난다. 연평균 7%씩 증가하면 에너지 소비는 10년마다 2배가 된다.
끔찍한 일이 아닌가. 지금도 에너지가 부족해서 난리인데 경제성장을 하려면 그만큼 더 많은 석유를 시추해야 하고 원자력발전소를 더 지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기에 그렇다. 특히나 원자력 에너지는 청정하지도 안전하지도 않은 에너지원이다. 그런데도 이런저런 이유로 원전 건설을 멈추지 못하고 있다,
혹자는 '탈(脫)원전'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벽이 '원전 마피아'라고 규정한다. 산업으로서의 원전이 규모가 비대해지면서 그에 기대 먹고살거나 콩고물을 얻어먹는 세력들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게다가 원전 건설'관리 과정에서의 썩은 내가 진동하고 있다. 원전 관련 비리를 저지른 자는 방호복 없이 원자로 근처에서 근무케 해야 한다는 극언이 세간에서 나올 정도로 여론은 들끓고 있다.
잇따른 고장과 정비, 납품 비리 때문에 국내의 23개 원자로 가운데 10개가 멈춰서는 초유의 사태가 빚어지고 있다. 블랙아웃(대규모 정전 사태) 걱정이 남의 일이 아닌 상황이다. 블랙아웃을 막기 위한 강제 순환 정전 시나리오가 제기되고 있는데 과연 우리 국민이 그것을 감내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지는 의문이다.
이철환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자녀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결핍의 경험'입니다." 그는 가난을 경험한 적이 없는 요즘 아이들은 물이 조금 쏟아져도 걸레 대신 티슈 10여 장을 뽑아든다고 했다. 기성세대의 거울인 아이만 탓할 일도 아니다. 기성세대는 결핍을 경험했지만 그것을 기억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존 라이언은 '지구를 살리는 7가지 불가사의한 물건들'로 ▷자전거 ▷콘돔 ▷천장 선풍기 ▷빨랫줄 ▷타이국수 ▷무당벌레 ▷공공 도서관을 꼽았다. 목록만 보아서는 황당하거나 납득이 안 가는 것도 있지만, 이 물건들이 왜 지구를 살릴 수 있는지에 대한 저자의 위트 섞인 설명을 읽다 보면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인간은 지금 지독한 '세대 이기주의'에 빠져 있다. 경기 침체로 어렵다 어렵다 하지만, 인류가 이 정도나마 풍요를 누리는 것은 유사 이래 처음이다. 이대로의 풍요는 당연히 지속되어야 하며 인간에게 그런 기술력과 이성이 있다는 막연한 낙관론에 젖어 있다면 인간호(號)라는 범선은 항해 도중 크라켄과 맞닥뜨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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