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인터넷에서는 사진 한 장이 작은 화제를 모았다. '짜파구리, 분식점 점령'이라는 제목의 게시물이었다. 지난 2월 TV 예능프로그램에서 소개된 이후 폭발적 인기를 끌고 있는 '짜파구리'(짜파게티+너구리 라면)가 음식점의 정식 메뉴가 됐다는 내용이다. 맛과 유래를 둘러싼 누리꾼들의 공방에다 수프의 나트륨 함량이 높아 건강에 좋지 않다는 비판까지 제기되기도 했지만 새로운 레시피(recipe'조리법)에 대한 소비자들의 호기심은 끝이 없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른바 '모디슈머'(modisumer)들이 창조해내는 색다른 맛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창조적 파괴자, 모디슈머
모디슈머는 영어 단어 'modify'(수정하다'바꾸다)와 'consumer'(소비자)의 합성어이다. 제품을 만든 회사에서 제시하는 방식 대로가 아니라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제품을 즐기는 소비자를 일컫는다. 서로 다른 재료를 변형하거나 섞어 이색적인 별미 요리를 만드는 소비자를 주로 말한다.
'짜파구리'의 경우 서로 다른 제품을 하나로 재탄생시킨 대표적 사례다. 인터넷에는 무수히 많은 비법이 소개돼 있지만, 기본 조리법은 간단하다. 비벼서 먹는 라면 '짜파게티'와 국물이 있는 '너구리'를 같이 끓인 뒤 물은 적당히 남기고 두 제품의 수프를 넣고 비비면 된다. 제조업체가 라면 포장지 뒷면에 '친절하게' 적어준 표준조리법은 완전히 무시되는 셈이다. '신라면', '오징어짬뽕'에다 '짜파게티'를 섞은 '신파게티', '오파게티'도 등장했다.
지난달부터는 '골빔면'과 '너볶이'가 히트 레시피 대열에 합류했다. 모두 TV 예능프로그램에서 선보인 뒤 인기몰이 중이다. '골빔면'은 골뱅이 통조림과 비빔 라면을 이용한 메뉴이고, '너볶이'는 라면 '너구리'와 떡볶이를 합친 요리다.
새로운 라면 조리법의 인기는 국내에만 머무르지도 않을 전망이다. 미국의 유명 라면 블로거가 자신의 블로그에 '짜파구리'와 '골빔면'의 조리법을 상세히 올리면서 해외 라면 마니아층에서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라면에서 시작된 모디슈머 바람은 식품업계 전반에 퍼지고 있다. 음료나 시리얼'즉석밥'안동찜닭 등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는 것. 아침식사 대용이나 다이어트 식품으로 애용되는 시리얼은 보통 우유와 함께 먹지만 요즘엔 요거트나 크림수프'샐러드'과일 등과 섞는 레시피가 유행이다.
모디슈머들은 안동찜닭에 콜라를 섞는 창의성도 보여준다. 일명 '코카콜라 찜닭'으로 알려진 레시피는 한 블로거가 "매콤하고 짭짜름한 안동찜닭에 콜라 1캔을 넣었더니 달콤해졌다"고 소개하면서 유명해졌다. 똑같은 즉석식품을 먹어도 남과 다르게 먹으려는 시도가 늘면서 기발한 레시피들이 넘쳐나고 있는 상황이다.
음주 후 숙취 해소용으로 이용되던 '헛개수' 음료를 기본으로 활용해 만든 믹스 음료 또한 젊은 층에서 반응이 좋다. 술을 깨는 데 도움이 된다는 심리적 효과와 헛개수 특유의 깔끔하고 담백한 풍미가 칵테일용으로 안성맞춤이기 때문이다.
'모디슈머 바람'은 식품업체와 음식점들에도 영감을 제공한다. 대구 시내 각 대학가 주변 식당에는 최근 재미있는 아이템들이 잇따라 등장하고 있다. '밥버거' '짬뽕 봉골레' '떡볶이 치킨' 등이 소비자들의 발길을 붙잡고 있다. 계명대학교 홍보팀 한 관계자는 "학생들은 새로운 트렌드에 민감한 소비층이어서 대학 주변 음식점마다 새로운 메뉴 개발 경쟁이 치열하다"며 "페이스북'카톡 등 SNS의 활성화도 이색 먹을거리 확산에 한몫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기업 마케팅
기업 입장에서는 실험정신으로 무장해 '트랜스포머 레시피'를 끊임없이 개발'공유하는 소비자들은 고맙기만 한 존재다. 입소문이 확실하게 나면 매출 상승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모디슈머를 대상으로 한 기업들의 마케팅 열기가 뜨거울 수밖에 없다.
실제로 '짜파구리'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이들 제품은 '신라면'을 누르고 라면 분야 매출 1, 2위에 오르기도 했다. 실적이 개선되면서 라면시장 1, 2위 업체인 농심과 오뚜기의 주가는 올 들어 크게 올랐다.
조리법을 매개로 식품업체 간 협업(콜라보레이션)도 이뤄져 주목된다. 롯데슈퍼는 짜파구리처럼 함께 구입할 가능성이 큰 연관제품을 할인판매하는 '환상의 짝꿍' 행사를 열고 있다. '골빔면'(골뱅이+비빔면)의 재료인 '팔도 비빔면'과 '동원F&B 골뱅이' 등 짝을 지어놓은 제품들을 동시에 구입하면 따로 살 때보다 10%가량 할인해준다.
롯데슈퍼의 이번 행사는 '짜파구리' 판매 성과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 정지훈 롯데슈퍼 대구 수성지점장은 "지난 4월에 너구리와 짜파게티를 동시에 구매하면 할인해주는 행사를 진행했더니 행사 직전 일주일보다 매출이 약 140% 늘었다"며 "두 제품을 동시에 구매한 고객도 4명 중 3명에 달했다"고 말했다.
기업체들은 TV 광고뿐 아니라 자사 블로그, 페이스북 등을 통해 다양한 이벤트를 진행하기도 한다. 라면 업체들은 자체 홈페이지'웹진 등에서 소비자들이 개발한 새로운 레시피를 소개하고 있고, 자사 제품을 활용한 요리대회를 후원하는 경우도 있다. CJ제일제당의 경우 헛개수 칵테일이 유행하자 서울 홍대 앞 등에서 아예 '헛개 트럭 카페'를 운영하며 모디슈머의 레시피로 만든 칵테일을 무료로 나눠주는 마케팅을 펼치기도 했다.
◆'먹방'이 일등 공신
'짜파구리' 레시피는 2009년 한 대학생의 블로그를 통해 퍼지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몇몇이라면 마니아들이 재미 삼아 즐기는 음식에 불과했던 이 메뉴가 '대세'로까지 떠오른 것은 방송이 절대적 영향을 미쳤다. '짜파구리'는 MBC 예능프로그램 '일밤-아빠! 어디가?'에서 방송인 김성주 씨가 선보인 게 계기였다. KBS 예능프로그램 '1박2일'에서 배우 최강희가 선보인 '너볶이' 역시 마찬가지다.
KBS 예능프로그램 '해피투게더 시즌3'의 '야간매점' 코너는 푸드 믹솔로지(기존 제품들을 섞어 전혀 다른 신메뉴로 재탄생시키는 것)의 등용문으로 많은 화제를 낳고 있다. '골빔면' '뻥스크림'(뻥튀기+아이스크림) 등 호응이 좋은 메뉴는 방송 직후 인터넷 포털사이트의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내릴 정도다. 마트에서 장을 보던 주부 손진이(대구 수성구 범물동) 씨는 "젊은 주부들 사이에서는 TV 프로그램에 소개된 메뉴들이 대화 주제로 자주 오르내리곤 한다"며 "값싸고 간편하면서도 맛있을 것 같아 나도 한 번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고 말했다.
물론 연예인들이 방송에 나와 자신만의 레시피를 소개하면서 새로운 메뉴가 대중화되는 현상에 대해 일각에서는 '먹방'(먹는 방송)', '짜고 치는 고스톱'이 아니냐는 의혹을 보내고 있기도 하다.
전통적인 소비 형태를 벗어나 새로운 도전에 나서는 소비자들을 지칭하는 신조어들은 '모디슈머'뿐 아니라 계속 등장하고 있다. 평범한 제품에 변화를 더해 새로운 제품으로 진화시키려는 소비자인 '메타슈머'(metasumer), 관습이나 광고에 얽매이지 않고 항상 새로운 무언가를 시도하는 '트라이슈머'(trysumer), 직접 제품을 구매한 사람들의 상품평을 토대로 구매하는 소비자 집단인 '트윈슈머'(twinsumer), 소비자 개인의 만족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혜택을 위해 의견을 제시하는 소비자인 '소셜 슈머'(socialsumer) 등도 있다.
실험정신과 창의력으로 무장한 채 우리 사회의 신소비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는 이들의 활약은 기업들의 마케팅뿐 아니라 우리 일상생활에도 점점 더 큰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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