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무명칼럼] 지금, 대구의 정체성은?

300여 년 전 어떤 동물학자가 검은 백조를 발견했다. 사람들을 경악했다. 백조는 당연히 모두 하얗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블랙 스완 즉 흑조(黑鳥)도 있다는 사실로 인해 그동안의 믿음이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검은 백조의 출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지만, 일단 출현하면 엄청난 충격과 파급효과를 가져온다. 지금까지의 통념과 믿음이 서서히가 아니라 어느날 하루아침에 통하지 않는 '블랙 스완 효과'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과거의 경험에 의한 판단이 지금 행동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되고, 미래에 유효하다는 보장도 없다는 것이 블랙 스완의 경고다.

블랙 스완 효과를 가져온 대표적인 사례는 지난 2008년 리먼브러더스 파산에서 시작된 글로벌 금융 위기이다. 파산 보호를 신청할 당시 자산 규모가 6천390억 달러에 달했던 리먼 사태는 서브프라임 모기지의 후유증이다. 리먼 사태 이후 금융 시스템에 대한 신용은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신용은 한 사회의 질서나 부를 지켜가는 원천으로, 하드웨어나 물건이 아닌 자산이다. 믿음이 무너진 사회, 따뜻함과 인성이 무너진 사회는 위기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위기이다.

세상이 싫다고 떨어지는 아이, 자살하는 노인이 OECD 회원국 가운데 1위를 차지하고, 여권(女權)이 신장되면서 세계 최저 출산율은 불 보듯 뻔한 얘기인데 진즉에 입법부 행정부가 함께 대처할 방안을 찾지 않고 있다가 뒤늦게 허둥대기만 한다. 그런데도 예산 마련과 속도 조절에 대한 충분한 검토 없이 표심을 겨냥해서 마구 공약하고, 확장한 사회복지는 어느덧 권리가 되어버려 받는 사람도 고맙다고 여기기는커녕, "이것 먹고 어떻게 살라고 그래?"라며 목소리를 높이면서 일선 사회복지 공무원들에게 험한 말을 쏟아내고 있다.

석학들은 우리나라 특유의 대가족 제도와 가족주의가 세계 강국이 될 힘이라고들 분석했지만, 그 분석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대한민국의 가족주의는 급격하게 사라지고 있다. 하버마스도 대한민국은 자체적으로 갖고 있는 불교, 유교 문화가 세계적으로 발전해 나갈 원동력인데 왜 자꾸 서양철학, 외국에서 뭘 찾느냐고 일찌감치 고언했지만 우리가 갖고 있는 것에 대한 장점을 살려나가려는 시도는 교육부에서도, 지자체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최근 들어 대구의 지역적 정체성이 애매하다는 소리가 자주 들린다. 과거 6'25를 전후해서는 피란민들로 인해 대구가 문화의 수도 역할을 한 적이 있다. 수많은 문인과 예술가들이 대구로 피란 와서 활동한 까닭에 아직도 대구에는 수준 높은 근대문화의 흔적들이 꽤 남아있어 골목투어로 되살아나고 있다. 그러나 과거 대구가 능금과 섬유도시로 비교적 분명한 지역적 정체성을 갖고 있던 것과는 달리 요즘은 뚜렷한 정체성을 찾을 수 없다. 광주가 민주화의 성지로, 경상북도가 위기 때마다 나라를 살린 호국 정신과 선비 정신을 기반으로 한 정체성 찾기 사업에 매진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대구는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시도를 찾아보기 어렵다.

대구향교는 최근 정체성 찾기와 관련, 인성교육원을 세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미 대구시로부터 3천만 원의 예산을 받아서 대구 남산동 향교 주변에 인성교육원을 세우기 위한 용역 조사를 대구경북연구원에 의뢰키로 한 대구향교의 이런 움직임은 상당한 타당성을 지니나 보완해야 할 점도 많다. 타당성은 대구가 조선 시대 모든 선비들이 가장 높게 떠받들었던 한훤당 김굉필을 모신 도동서원의 고장이라는 점이다. 깐깐하지만 강직했던 한훤당은 사화에 연루된 탓에 남긴 책들이 모두 불태워져 그의 학문 세계와 철학에 대해서 제대로 알 길 없다. 하지만, 책 한 권 남기지 않고도 동방오현의 첫머리에 오르는 것은 그의 지조와 비장한 죽음이 남긴 의미이다. 도학정치의 아이콘인 조광조가 유배 간 김굉필을 찾아 2년간 배우며, 그를 평생의 스승으로 모셨던 점만 봐도 대구에 인성교육원이 들어설 명분과 근거는 충분하다.

대구향교의 현 시스템으로는 역부족이다. 전통교육기관인 대구향교의 600년 역사를 축으로 하면 인성교육원의 설립 근거는 충분하지만, 젊은 세대를 아우르고 새로운 시대정신을 담아내려는 노력은 크게 보완되어야 한다. 지역의 어르신들이 대구향교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것은 축복이다. 그러나 어린이와 청소년을 보듬고 새로운 메커니즘을 받아들이려는 노력이 곁들여져야 대구향교 인성교육원은 출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대구의 정체성도 확립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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