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가톨릭 의료사업은 박해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859년 시작한 시약소는 1866년 병인박해로 중단됐다. 당시에는 중인층 천주교 의원들의 전통 한방의술이었고, 이후 선교사들의 의료활동으로 이어진다. 중단된 의료사업은 1880년대 신앙의 자유가 허락되면서 조선에 진출하기 시작한 수도회들에 의해 다시 시작됐다. 가장 먼저 의료활동을 시작한 수도회는 1888년 최초로 한국에 진출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였고, 다른 수도회들도 매우 작은 규모로 진료를 시작했다.
◆1910년대 대구에서 처음 무료진료소 개설
가톨릭 교회의 의료사업은 크게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먼저 1930년까지 서양 의학의 도입 및 진료소 시기다. 대부분 무료로 약을 나눠주는 시약소 정도의 진료소로 운영됐다. 그 후 1930~1950년까지 의원들이 잇따라 들어섰다. 가톨릭교회 병원이 정식 의료기관으로 설립돼 진료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1951년 이후에는 전쟁 탓에 발생한 수많은 이재민을 돕기 위해 병원 중심의 의료활동을 펴게 된다. 해외 각국의 도움이 이어졌고, 의료사업도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는 조선에 진출한 즉시 고아원과 양로원을 열었다. 1894년 제물포(인천)에서 본당 사목과 고아원 사업을 펼쳐 나갔다. 이어 수녀들은 1897년 제물포, 1899년 서울에 무료진료소를 개설했다. 샬트르 성 바오로수녀회는 1911년 대구교구가 분할 독립되면서 이곳에 수녀들을 파견해 1917년 수녀원 안에 보육원을 세우게 됐다.
그와 동시에 어린이들을 위해 약국을 겸한 무료진료소를 열었다. 보육원 아동뿐만 아니라 주변 극빈자들에게도 무료 진료와 시약을 했다. 이런 사실이 널리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외래환자는 점차 많아졌다. 대구의 의료사업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한동안 중단됐다가 1930년대 다시 본격화됐고, 1933년에야 병실을 갖춘 진료소를 세웠다.
◆1931년 성요셉무료진료소 개원
1930년대에는 병원은 턱없이 부족했고, 제대로 된 치료약을 구하기도 힘든 시절이었다. 병을 치료해 보지도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대부분 서민들이 그러했고, 예외는 없었다. 당시 대구교구 성직자들도 잇따라 질병으로 숨지는 일이 벌어졌다. 가뜩이나 성직자가 부족해 힘에 겨운 대구교구로서는 안타까운 일이었다.
드망즈 주교는 대구교구 내 성직자들을 위한 병원을 세우기로 결심했다. 드망즈 주교는 1911년 6월 초대 대구교구장으로 부임한 뒤 1938년까지 여러 분야에서 교구의 기초를 다진 인물이다. 드망즈 주교는 1931년 6월 의무실 설계도를 만들었고, 그해 8월 의무실과 부속건물의 기초공사를 시작했다. 병실은 두 동으로 이뤄져 있는데, 한 동은 화상환자를 위한 의무실, 다른 한 동은 병실이 필요없는 환자들과 휴식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한 별관이었다. 건물은 11월 완성됐다.
의무실은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경내에 자리 잡고 있었고, 운영 책임은 프랑스인 르네 브르니에 간호사 수녀에게 맡겼다. 원래 병원이 성직자들을 위해 세워진 것이었지만, 돈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는 가난한 일반인들에게도 무료 진료를 해주면서 '성요셉무료진료소'가 됐다. 하지만 너무 많은 환자들이 몰려 1년도 못돼 증축이 불가피해졌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무료 진료
개원 이후 환자는 꾸준히 늘었다. 환자가 찾아와 약을 준 경우와 간병 및 진단을 합친 숫자는 1933년 2만2천여 명에서 1935년 2만9천여 명, 1936년 3만8천여 명, 1937년 5만여 명, 1938년 6만4천여 명으로 급속히 늘었다.
이처럼 많은 환자가 몰리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완전한 무료 운영에 대해 일제강점기이던 당시 의사와 약사 조합에서 반대에 나선 것. 그러나 1933년 6월 성요셉무료진료소가 천주교 신자인 박영대 원장이 운영하던 중앙병원의 부속병원이 되면서 문제는 해결됐다. 박 원장은 성요셉무료진료소에 정기적으로 찾아와 환자를 돌보던 촉탁의사였다.
1934년 7월 드망즈 주교는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의 협조를 얻어 수녀원 본원 내에 보육원 원아들을 위해 대기실'조제실'진찰실'공동병실'의사실'간호사실 등을 갖춘 314㎡ 규모의 성요셉시료소를 신축했다. 당시 환자 수는 매일 250~3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후 1955년 성요셉시료소는 정식 인가를 얻어 '성요셉의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하지만 의료 혜택을 볼 수 없던 이들에게 희망의 빛이었던 성요셉의원은 1973년 우여곡절 끝에 운영난으로 결국 문을 닫았다.
◆가톨릭교회 첫 종합병원인 해성병원
드망즈 주교가 1930년대 성요셉무료진료소를 열 당시 박영대 원장의 대구 중앙병원 부속병원으로 허가를 받았다. 그런 인연으로 박 원장은 대구교구와 꾸준한 관계를 맺어왔다. 이후 약 20년이 흐른 뒤 박 원장은 여러 사정으로 더 이상 병원을 운영할 수 없는 형편이 됐다. 당시 대구시내에 개원한 여러 의사들 중에서 병원 인수자를 찾았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병원 규모가 워낙 커서 아무도 인수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결국 박 원장은 당시 대구교구의 최덕홍 주교에게 병원 인수를 요청했다. 제6대 교구장인 최덕홍 주교(1949~1954년)는 실질적으로 대구교구장을 맡은 최초의 한국인 주교였다. 당시 최 주교의 비서 신부는 훗날 추기경이 된 김수환 신부였다. 마침 교구 내에 가톨릭병원을 세우려고 했던 최 주교는 1950년 2월 16일 중앙병원(현 가톨릭근로자회관 자리)의 대지와 건물 등을 2천900여만원에 인수했다.
교구는 개원 준비와 병원 운영을 위해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에 수녀 파견을 요청했고, 1950년 5월 1일 '해성병원'이 개원했다. 초대 원장으로 서울의과대학 부속병원에 있던 조무준 씨가 취임했다. 개원 당시 진료과는 내과, 외과, 소아과, 안과였다. 의료진으로는 의사 4명, 간호사 샬트르 성바오로회 수녀 3명, 수녀 지원자 3명이 있었다. 해성병원은 6'25전쟁이 일어나자 야전병원으로 쓰였다. 1955년 성가병원으로 이름을 바꾼 뒤 1962년 8월 30일 파티마병원에 통합됐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감수=의료사특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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