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민송기의 우리말 이야기] 밴드 왜건과 대세

'살인마 잭'이라는 제목으로 공연을 했다가 망했던 뮤지컬이 똑같은 뜻의 제목 '잭 더 리퍼'라는 제목으로 새롭게 공연을 하여 흥행에 성공한 예가 있다. 제목을 바꾸면서 공연 내용을 약간 수정한 부분이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제목에서 느껴지는 어감의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살인마 잭'이라고 하면 뭔가 끔찍하고 잔인한 내용이 나올 것이라는 느낌, 즉 연인과는 함께 보기 힘든 것이라는 느낌이 들지만, '잭 더 리퍼'라고 하면 '무엇을 하는지 모르지만 왠지 있어 보이는 잭'이라는 그런 연상이 든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외국어를 그대로 쓰는 것에 대해서 일부 학자들은 거부감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우리말로 순화하는 것이 잘 안 되는 이유는 '살인마'의 예에서 볼 수 있는 어감 때문이다. 1974년에 방송에서 너무 외래어를 남발한다는 학계의 지적을 받은 정부가 '방송용어정화위원회'를 설립하고 무조건 순 우리말이나 한자어로 바꾸라고 강제한 적이 있다. 그래서 '가요 페스티벌'은 '가요 대향연'으로, '해외토픽'은 '해외소식'으로 바꾸고, 가수들 이름까지 '블루벨스'는 '청종들'로, '어니언스'는 '양파들'로 강제로 개명을 시켰다. 지금 보면 우습기 그지없는 이 일은 '양파'가 불러일으키는 연상과 느낌은 '어니언'이라는 잘 모르는 말에서 느껴지는 이국적인 느낌과 다르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말만의 순화를 주장하는 국어학자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상황이 우리 역사의 부끄러운 한 페이지로 남아 있다.

어감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는 학술 용어들 중에는 우리말로 번역을 해도 의미가 잘 통하지 않아서 그냥 원어를 사용하는 경우도 많다. 추석날 친척들이 많이 모이면 꼭 빠지지 않고 하는 이야기가 정치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이때 괜한 논쟁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 사람이 많이 지지하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는데, 사람들이 많은 쪽을 따라가는 것에 대해 정치학에서는 '밴드 왜건' 효과라고 한다. '밴드 왜건'은 악대 마차를 뜻하는 것으로 서커스단이나 축제의 악대 마차가 가면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몰려가는 것에서 생긴 말이다.

우리가 국어 순화를 하려고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의사소통의 편리를 위해서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밴드 왜건'이라고 하면 곧바로 어떤 의미인지 알기 어렵기 때문에 이 용어만으로는 의사소통에 장애가 생긴다. 그래서 '밴드 왜건' 효과란 어떤 현상을 의미한다, 왜 '밴드 왜건'이라고 한다는 두 단계의 설명을 덧붙여야 한다. 그런데 이를 순화하기 위해 그대로 번역해서 '악대 마차' 효과라고 하면 역시 두 단계의 설명을 거쳐야 하므로 의사소통상의 유리함이 전혀 없다. 사실 이 상황에 꼭 맞는 우리말로 '대세'라는 말이 있다. '대세'가 되면 지지자가 늘기 때문에 너도나도 '대세'임을 강조한다. 이처럼 우리말 순화는 외국어를 그대로 번역을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 어감과 의미 등을 우리 상황에 맞게 해야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다.

능인고 교사 chamtc@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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