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에세이 산책] 사즉필생(死則必生)

세상살이가 워낙 팍팍하다 보니 주변에 알던 분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소식을 가끔 듣는다. 그럴 때면 몹시 당혹스럽고 마음이 아프다. 그런데 그 이유가 경제적인 문제 때문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더욱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나 또한 그런 지경까지 몰린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음대로 될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진즉에 무슨 대책을 세웠어야 했다. 때를 놓치면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막지 못한다'고 하는데 말이다.

지난 2004년 추석을 보낸 직후, 나는 2년 6개월 동안의 천안 생활을 접고 대구로 돌아왔다. 큰 기대를 하고 떠난 천안에서 무엇 하나도 건지지 못한 채, 그야말로 적수공권(赤手空拳'아무런 대책이 없는 상태)으로 낙향을 했던 것이다. IMF 외환위기 직격탄에 무너진 후 아직 재기를 못하고 있던 때라 절망감은 극에 달했다. 비장한 다짐을 했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결판을 내자!" 술병을 껴안고 폐인이 되어 가는 것보다는 그래도 일을 하다가 장렬히 쓰러지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가진 재산 다 털고 할부금 이용해서 겨우 중고 대형트럭 한 대 샀다. 생판 처음 뛰어드는 운수업의 시작이었다. 망하면 바로 파멸이었으니 배수의 진이 따로 없었다. 돈만 생각하고 불가능에 도전을 했다. 대구에서 수도권까지 차 두 대가 교행(交行)하던 일을 혼자서 떠맡았다. 물론 수입도 두 배였다. 차에서 자면서 당일치기로 왕복 운행을 했다. 집 구경은 언감생심이었다. 남들은 죽으려고 환장을 했다며 미친 사람 취급을 했다. 조수석에 저승사자를 태우고 다녔다. 악이 받치니 죽음은 별로 두렵지 않았다.

예전에는 경기도 화성으로 갈 땐, 천안IC에서 내려 39번 국도를 많이 이용했다. 그 중간 아산 음봉면에는 이순신 장군의 묘가 있다. 시간 여유가 조금이라도 생기면 장군 묘소에 들러 큰절을 넙죽 하곤 했다. 신의 존재나 종교 같은 것에는 회의적이었던 내가 왜 장군의 묘소를 찾았을까? 기(氣)를 받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장군의 그 유명한 '생즉필사 사즉필생'(生則必死 死則必生) 정신을 배우기 위함이었다. 그만큼 절박했다. 그 생활을 6년이나 했다.

우리 인간은 아무리 극한 상황이라도 3개월만 견디면 적응을 하게 마련이다. 뱀은 머리만 들어가면 어떤 작은 구멍도 통과를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머리가 결정을 하면 몸은 어디든 따라간다. 문제는 정신력인 것이다. 일이 풀리지 않고 슬럼프가 계속되면 사생결단 승부수를 띄워야 한다. 흘러가는 세월에 쓸려 다니다간 언제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릴지 모른다. '운명'이란 냉혹하다. 궁지에 몰렸다고 절대 동정을 베풀지 않는다. 스스로 곤경에서 벗어나는 길뿐이다.

장삼철/㈜삼건물류 대 jsc103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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