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동순의 가요 이야기] 난센스 음반에 힘 쏟은 배우 김연실(상)

웃음 잃은 시대에 풍자·해학적 장르 진출해 맹활약

1930년대 음반자료의 목록을 보노라면 난센스, 스케치란 장르의 음반들이 자주 눈에 들어옵니다. 지금은 낯선 이 음반의 제목들을 살펴보면 대개 웃음을 유발시키는 코믹한 것들이 많습니다. 삶에 풍부하게 넘실거려야 할 웃음이 수탈과 유린의 식민통치 속에서 현저히 사라져버린 세월, 당시 주민들은 가족과 고향의 주변 환경을 돌아다보면 그저 눈물과 탄식,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현실에 대한 불만과 그로 인한 우울증의 확산은 점점 강한 자극과 감각으로 무디어져 갔습니다.

이러한 때에 음반제작과 발매에 종사하던 담당층들은 반드시 가요음반만이 아니더라도 또 다른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음반도구가 없을까 고민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나오게 된 것이 바로 난센스, 스케치 등속의 음반입니다. 이 음반들이 다루고 있는 대상은 주로 식자층, 지배층의 모순된 삶과 부조리에 관한 것입니다. 가뜩이나 일본의 퇴폐적인 성 풍속과 향락산업이 식민지 조선으로 흘러 들어와서 세상을 더더욱 혼탁하게 휘몰아갈 때에 민중들은 그들에 대한 풍자와 냉소와 더불어 비판까지 다룬 음반인 난센스와 스케치 따위를 들으며 시원한 통쾌감과 카타르시스를 느꼈을 것입니다.

이 종류의 음반에는 당대의 풍속과 문화가 일정하게 반영되어 있습니다. 소화(笑話), 혹은 막간극이 무대에서 인기를 얻어가자 음반사들은 재빨리 이에 대응하여 난센스, 스케치류의 음반을 제작 생산했습니다. 웃음이라곤 찾아볼 수 없던 음산한 시절에 이처럼 해학적이고 풍자적인 웃음을 잠시나마 경험할 수 있게 하였으니 그 얼마나 값진 도구인지 모릅니다.

한국음반사에서 난센스 음반의 최초는 언제부터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1932년 2월경으로 보입니다. 당시 콜럼비아레코드사에서 '레코드부부'란 제목의 난센스 음반을 2매로 발매했는데, 여기에 참여한 사람은 김영환, 김선초, 강석연 등입니다. 이 음반이 기록으로 확인해보는 최초의 난센스 음반입니다. 1932년 한 해 동안에만 무려 21편의 난센스 음반이 나왔습니다. 내용은 대개 기생의 사랑과 이별, 생활고, 황금만능주의 및 그러한 결혼관, 남성중심적 사고로 가득한 가정생활 등이었고, 구성방법은 작고 가벼운 웃음거리인데 가령 등장인물들끼리 서로 말꼬리를 잡는다거나 익살스러운 말장난, 재치문답식의 대결, 반복적인 실수 등입니다.

오늘 다루고자 하는 것은 배우로서 가수를 겸했고, 아울러 1930년대 난센스 장르까지 개척했던 김연실(金蓮實'1910∼1997)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김연실은 1927년 나이 18세에 오빠의 소개로 나운규프로덕션 영화 '잘 있거라'에 시골소녀로 출연한 뒤 이후 1935년까지 다수의 영화에 활발하게 출연했던 유명배우였습니다. 당시 레코드회사들은 배우의 인기를 음반 제작과 보급에 이용해보려는 의도에서 그들의 목소리로 취입된 음반을 속속 발표했습니다.

김연실은 1930년에 8편의 음반을 발표하는데 영화소패, 유행창가, 민요, 동화 등입니다. 1932년에는 유행소곡 7편을 비롯해서 난센스 2편, 영화극과 풍자극을 각 1편씩 발표합니다. 1933년부터는 난센스 취입이 부쩍 늘어납니다. 풍자희극과 폭소극 등을 포함해서 난센스류는 무려 11편이나 됩니다. 1934년에도 난센스류는 11편인데, 유행가는 1편에 지나지 않네요. 이듬해에도 난센스류만 2편 발표합니다. 김연실이 발표한 음반은 도합 53편인데, 그 가운데서 난센스류만 29편이니 절반이 넘습니다. 김연실이 발표한 난센스류의 제목은 '신가정생활'(상하), '서양장한몽'(상하), '항구의 에레지' 등입니다.

영남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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