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동호동락] 내리사랑과 치사랑

흔히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라는 말을 하곤 한다. 이 말은 부모와 자식 간에 쏟는 사랑의 차이를 일컫기도 하지만 손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에게 쏟는 정성이 다름을 이르기도 한다. 이 말처럼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보통은 손윗사람이 손아랫사람을 챙기는 마음이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생각하는 마음보다 강하기 마련이다.

내가 학교에 다녔던 시절에도 그랬다. 위 학번 선배들은 새로 입학한 우리들이 학교에 적응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살뜰히 챙겼고, 다음해엔 우리가 새로 들어온 후배 새내기들을 챙겼다. 그 이듬해에는 후배들이 또 새로 들어온 새내기 챙기기에 바빴다. 이렇게 정성을 쏟았던 후배들의 관심은 정작 그들 아래의 후배들에게 쏠리는 것을 보니 뭔가 허탈했지만, 나 역시 그랬고 나의 선배들이나 후배들 역시 나와 동일한 감정을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씁쓸하지만 원래 다들 그런 것이구나 하고 섭섭한 마음을 접었다.

이 기분을 체셔와의 관계에서도 종종 느끼게 된다. 강아지들이 '사람들이 우리에게 먹을 것을 선사해 주는구나. 그들은 우리의 신이구나'라고 생각하는 것과 달리 고양이들은 '인간이 우리에게 갖은 음식을 바치는구나. 고로 나는 신이구나'라고 생각한다는 우스갯소리처럼, 정말이지 체셔는 내가 자기를 살뜰히 챙겨주고 돌봐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는 듯하다. 가끔은 이런 얌체 같은 체셔가 괘씸해서 투덜거리기도 하지만 녀석이 좋아서 데려온 것도 나이고 돌보아주는 것도 나 좋아서 하는 일이기에 사실 큰 불만은 없다.

결국 내가 체셔에게 쏟는 것은 어떻게 보면 일방적이고, 헌신적인 '내리사랑'이다. 그런데 앨리샤가 오고 난 이후부터는 체셔와는 '다른' 고양이의 새로운 모습을 자꾸 발견하곤 한다. 체셔의 애정 표현은 대부분 '원하는 게 있을 때' 발현된다면, 앨리샤의 애정표현은 그런 '자신의 필요성'과는 무관하다. 그냥 사람이 좋아서, 우리 가족들이 좋아서 곁에 와서 '뾰롱'(고양이가 내는 소리라기엔 좀 이상하지만) 거리는 것이다. 게다가 잠이 들었거나 한창 몸단장 중인 앨리샤에게 손을 뻗으면 어김없이 내 손까지 정성스레 그루밍 해 주곤 한다.

이런 앨리샤의 무한 애정 대상에는 '체셔'도 포함이 됐지만 안타깝게도 체셔는 늘 차가웠다. 앨리샤가 체셔 곁으로 다가가 발라당 누워서 친근감을 표현하면, 체셔는 어김없이 벌떡 일어나 가버리곤 하는 것이다. 그래도 거기에 굴하지 않은 앨리샤의 끊임없는 애정표현 덕분에, 요즘은 체셔의 곁에 앨리샤가 머무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심지어 앨리샤는 누워 있는 체셔 곁에 가서 등을 맞대고 잠을 자다가 체셔의 얼굴을 정성스럽게 그루밍 해 주기도 한다. 이런 앨리샤를 볼 때면 (비록 체셔가 앨리샤보다 6살이나 많고, 체셔의 얼굴이 앨리샤 얼굴의 1.5배는 크지만) 마치 어미 고양이가 자신의 아기를 돌보는 듯한 사랑이 느껴진다. 그리고 체셔도 이런 앨리샤의 행동이 싫지 않은지 눈을 지그시 감고 있다. 정말 내가 바라마지 않던 정말 다정한 오누이의 모습이다. 이렇게 우리 집 고양이 둘 사이를 보면 '내리사랑'은 없어 보여도 '치사랑'은 아주 잘 보인다. 물론 가끔 앨리샤에게 참치를 양보해 주기도 하고, 귀찮게 해도 '어느 정도까진' 참아주는 체셔의 모습을 볼 때면 '내리사랑'이 전혀 없는 것 같지는 않다.

'반포지효'(反哺之孝)를 떠올려 보면 어쩌면 '내리사랑'은 몰라도 '치사랑'만큼은 동물들이 더 알뜰히 챙기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연말연시인 만큼 이들처럼, 사람이든 동물이든 받은 만큼 베풀고, 그리고 받지 않았더라도 먼저 챙겨주고 베푸는 모습이 많아지길 살짝 바라본다.

장희정(동물 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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