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권서각의 시와 함께] 너를 사랑한다

로봇
mWiz 이 기사 포인트

강은교(1945~ )

그땐 몰랐다

빈 의자는 누굴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의자의 이마가 저렇게 반들반들해진 것을 보게

의자의 다리가 저렇게 흠집 많아진 것을 보게

그땐 그걸 몰랐다

신발들이 저 길을 완성한다는 것을

저 신발의 속가슴을 보게

거무뎅뎅한 그림자 하나 이때껏 거기 쭈그리고 앉아

빛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게

그땐 몰랐다

사과의 뺨이 저렇게 빨간 것은

바람의 허벅지를 만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꽃 속에 꽃이 있는 줄은 몰랐다

일몰의 새떼들,

일출의 목덜미를

핥고 있는 줄을 몰랐다

꽃 밖에 꽃이 있는 줄 알았다

일출의 눈초리는

일몰의 눈초리를 흘기고 있는 줄 알았다

시계 속에 시간이 있는 줄 알았다

희망 속에 희망이 있는 줄 알았다

아, 그때는 그걸 몰랐다

희망은 절망의 희망인 것을

절망의 방에서 나간 희망의 어깻살은

한없이 통통하다는 것을

너를 사랑한다. 

-시집『바리연가집』 실천문학사, 2014.

모든 존재는 관계 맺음 속에 있다. 빈 의지가 있어 앉을 사람이 있고 신발이 있어 걸어갈 길이 있고 절망이 있어 희망이 있다. 사랑도 그러하다. 그가 지금 없기에 내가 사랑하는 것이다. 이렇게 대상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은 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오랜 사유 속에서 깨닫는 것이리라. 나를 힘겹게 하는 사람이여, 너를 사랑한다.

시인

최신 기사

0700
AI 뉴스브리핑
정치 경제 사회 국제
국민의힘이 6·3 지방선거 대구시장 공천 방식에 대해 논란이 일고 있으며, 특정 후보에게 유리한 공천이 시도되자 지역 정치권에서 '민주정당이...
구미 부동산 시장에서는 비산동 6-2 부지에 최고 46층 규모의 초고층 아파트가 들어설 가능성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고 있으며, 이는 현재 구...
서울중앙지법은 화장실에서 빨리 나오라는 동생을 살해한 40대 남성에게 징역 10년과 치료감호를 선고했으며, 동생은 퇴근 후 목욕 중 불평하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16일 한국과 일본을 언급하며 호르무즈 해협에서의 군사 작전에 동참할 것을 촉구하며 파병 압박을 가했으나, 주한..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