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사필귀정] 古宅은 살아있다

'박물관이 살아있다'라는 흥미진진한 미국영화가 있었다. 2006년 겨울 개봉한 이 영화는 자연사박물관 야간 경비원으로 취직한 주인공이 밤이면 박물관의 모든 전시물이 살아 움직이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는 내용을 담았다. 원시인인 네안데르탈인과 포악한 공룡 티라노사우루스가 생명력을 회복하고, 원숭이와 사자 등 온갖 동물들이 마음대로 설치고 다닌다.

고대의 마야인과 로마의 검투사 그리고 개척시대 미국의 카우보이들이 되살아나 전쟁을 벌이며 박물관을 온통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심지어 낮에는 밀랍인형이던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살아나면서 실의에 빠진 주인공의 어깨를 다독거려주기도 한다. 어린이들의 상상력을 한껏 드높여준 영화로 어른들의 호기심도 은근히 채워준 작품이었다.

우리나라의 고택도 그렇게 되살아나 물질주의와 이기주의에 매몰된 현대인의 영혼을 잠시라도 씻어줬으면 하는 상상을 해본다. 수신제가(修身齊家)가 곧 치국의 근본(治國之本)이라, 사랑채에 촛불을 밝힌 채 밤이 이슥하도록 글을 읽는 선비의 그림자. 수를 놓던 손길을 멈추고 문틈으로 스며드는 애틋한 풀벌레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내별당 규수의 단아한 모습. 안채를 드나들며 봉제사 접빈객(奉祭祀接賓客)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는 종부.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산수간에 정자를 짓고 독락(獨樂)을 즐기며 학문과 후진양성에 전념하던 사대부. 늦가을 초저녁 행랑채에 모여앉아 새끼를 꼬며 걸쭉한 정담들 주고받는 머슴들.

고택은 그러나 늘 팔작지붕 위에 맑은 솔향기가 스치고, 안마당에는 교교한 달빛이 고즈넉이 머물러 있지만은 않았다. 더러는 청량한 강줄기가 내려다보이는 종택 대청마루에 둘러앉아 기울어가는 국운을 탄식하며 왜적의 침략에 맞서 싸울 결의를 다진 곳이요, 전란과 기근으로 피폐한 민초들을 구휼하기 위해 곳간을 열고 양식을 내어놓던 제세구민(濟世救民)의 요람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고택은 바로 조선시대 지식인인 유학자의 성장 공간이요, 사회적 리더였던 선비의 학문과 인격수련의 도장이었다. '선비가 추구하는 삶의 최고 목표는 자신의 도덕적 인격을 완성하고 그것을 사회적으로 실천해 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유학자들은 어릴 때부터 철저한 인격 수련과 학문 연마의 과정을 거쳤다. 따라서 성인이 되면 과거를 통해 정치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이 배운 것을 사회적으로 실천하고자 노력했고, 또 벼슬에서 물러나면 향촌으로 돌아가 후학들을 양성하며 학문을 정리하는 일에 전념했다. 선비라면 이 모든 과정을 마땅히 수행해야 할 사회적인 책무로 여겼다.'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문화박물관에 전시된 '유학자의 일생'이란 글귀 그대로이다.

경북지역에는 고택이 유난히 많다. 전국의 지정문화재 고택 747동 중 40%에 이르는 296동이 경북에 있다. 특히 문화체육관광부가 '전통한옥 관광자원화사업' 대상으로 지정한 고택 99곳 중 절반에 가까운 47곳이 경북에 위치한다. 그래서 경북도는 지난해부터 해마다 늘어나는 고택체험 관광객의 발걸음에 부응해 '고택관광 명품화사업'을 본격 추진했다. 고택에 깃든 우리 고유의 전통과 역사문화 그리고 한국적인 정취 등 소중한 가치를 발굴하고 이를 관광자원화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체험 프로그램을 다양화해 브랜드화하고 이를 위한 전문인력과 관리시스템 구축에 노력해왔다.

경북지역 중에서도 특히나 고택이 많은 안동에서 최근 마무리된 '고택 브랜드화 사업'이 그 좋은 예이다. 여러 고택 대표들이 참가한 가운데 묵계종택, 목재고택, 반구정, 삼산종택, 소산재, 향산고택 등 6개 고택에 대해 브랜드 개발 및 권리화를 마쳤다고 한다. 이 같은 고택이야말로 한층 경쟁력 있는 관광자원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관점이 있다.

그것은 찾아오는 내외국인 관광객이나 맞이하는 관리인이나, 고택을 그저 한 번쯤 머물다가는 오래된 집으로만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고택에 스민 예스러운 품격이나 향기로운 자연 공간에 편안히 몸을 맡기는 것도 좋지만, 그 속에 어린 정신과 철학도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한류의 원천이었음을 느껴야 한다. 그래야 고택이 살아나면서 영화 속의 장면처럼 생생한 감동을 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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