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에 들른 어느 날이었다. 발길 닿는 대로 서가들을 둘러보다 보니 어느덧 세계문학 코너 앞이었다. 별 수 없이 눈앞에 있는 책들을 이것저것 들추어보는 중이었다. 그때 뒤에서 한 모자(母子)가 다가왔다. 아이가 읽을 만한 책 한 권을 추천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이제 막 초등학교를 졸업한 아이는 억지로 끌려온 기색이 역력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이기도 했거니와 연신 안경을 고쳐 쓰며 그녀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아이의 표정에서 어떤 먹먹함이 느껴졌다.
부인의 심정은 이해할 수 있었다. 책 한 권이 사람의 인생을 바꾼다는 말도 있다. 게다가 근래 들어 부쩍 다양해진 세계문학 코너 속에서 어떤 책을 권해야 할지 망설여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생활이 고단하다면 이러한 종류의 선택은 더욱 힘들기 마련이다. 다만 아이의 성향에 대한 몇 가지 질문에 그녀는 연거푸 손사래를 쳤다. 서둘러 책이나 한 권 추천해달라는 뜻이었다. 살펴보니 아이의 한 손은 이미 그녀에게 꽉 잡혀 있었다.
언젠가 한 작가는 아이들이 문학을 제대로 접하려면 우선 정규교과 과정에서 문학을 제외시켜야 한다고 했다. 일률적인 문학교육에 대한 쓴소리이기도 했지만, 실상은 문학이 본래 놀이에서 출발하는 장르임을 역설한 것이다. 놀이란 흥미의 유무에 따라 참여하는 행위일 뿐이다. 즉 선택 가능한 영역이라는 말인데 대부분 아이들에게 있어 문학이란 선택 불가능한 놀이가 돼버린 지 오래다.
물론 부모는 되도록 좋은 선택지를 펼쳐줄 의무가 있다. 권유할 권리도 있다. 그러나 지금의 폭넓은 문화적 양상에 비해 대부분의 선택지는 상대적으로 너무 좁은 편이 아닌가 싶다. 문학도 좋고 독서도 좋지만 가장 좋은 것은 아이 스스로가 놀이의 선택지를 만들어나가는 놀이다. 설사 그 속에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해도 말이다.
강요할 것은 많다. 한데 문학까지 강요의 의미로 다가온다면 그것은 제 기능을 잃어버린 채 서가에 꽂혀 있는 셈이다. 오래전부터 문학의 위기라는 말들을 하는데 공교롭게도 홈쇼핑 채널에서는 고가의 세계문학전집이 순식간에 팔려나가는 중이다. 새로 개장한 대형 도서관에는 주말마다 가족 단위의 관람객들이 북적인다. 어딘가 아이러니한 모습이다.
부인의 재촉도 그러한 아이러니의 일부였다. 아이에겐 다른 놀이뿐만 아니라 책을 고를 선택권조차 없어 보였다. 아이에게 직접 관심사를 물었으나 부인이 다시 손사래를 쳤다. 아이의 표정은 시무룩했고 그녀의 부탁은 슬슬 짜증으로 변해갔다. 필요한 것은 문학이 아니라 말 그대로 책 한 권이었다. 아이에겐 미안했지만 나는 아이가 읽을 만한 책보다 읽었으면 하는 책을 집어들 수밖에 없었다. 부인에게 건네자 고맙다고 했다.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호밀밭의 파수꾼』이었다.
이승욱 월간 대구문화 취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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