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신도청 시대 하회마을] ③임진왜란, 그리고 류성룡과 징비록

"동네서 함께 자란 이순신 전격 배치…태극사상 기초로 탁월한 용인술"

문수지맥이라는 팻말이 박힌 검무산 정상에서 하회별신굿탈놀이 부네탈(손상락)과 이매탈(권오중)이 태극바위를 가리키고 있다. 산 정상 평평한 너럭바위에는 붉은빛이 나는 바위와 푸른빛이 도는 바위가 서로 역S자 모양의 바위틈으로 갈라져 태극무늬를 이루고 있다. 산 아래에 경북도청 신청사가 보인다.
문수지맥이라는 팻말이 박힌 검무산 정상에서 하회별신굿탈놀이 부네탈(손상락)과 이매탈(권오중)이 태극바위를 가리키고 있다. 산 정상 평평한 너럭바위에는 붉은빛이 나는 바위와 푸른빛이 도는 바위가 서로 역S자 모양의 바위틈으로 갈라져 태극무늬를 이루고 있다. 산 아래에 경북도청 신청사가 보인다.
하늘에서 본 하회마을은 낙동강 본류가 마을을 휘감아 돌면서 뚜렷하게 산태극과 물태극의 지형세를 보여 주고 있다.
하늘에서 본 하회마을은 낙동강 본류가 마을을 휘감아 돌면서 뚜렷하게 산태극과 물태극의 지형세를 보여 주고 있다.
하회별신굿탈놀이 부네탈과 이매탈이 검무산 정상에 올라 준공을 앞두고 있는 산아래 경상북도 신청사를 가리키고 있다. 멀리 하회마을을 휘감아 흐르는 낙동강이 보인다.
하회별신굿탈놀이 부네탈과 이매탈이 검무산 정상에 올라 준공을 앞두고 있는 산아래 경상북도 신청사를 가리키고 있다. 멀리 하회마을을 휘감아 흐르는 낙동강이 보인다.

400여년 전 한반도는 대륙 침략의 야심을 품은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키면서 전화에 휩싸였다. 무려 7년간의 전쟁으로 조선의 강토는 초토화되고 말았다. 왜적들의 수탈과 유린으로 백성들의 삶은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도탄에 빠졌다.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조정은 동인'서인도 부족해 남인'북인으로 분열돼 사사건건 대립했다. 백척간두에 처한 국가적 위기를 외면하고 당파싸움에만 혈안이었다. 하회마을이 고향인 서애 류성룡은 멸망의 위기가 목전에 닥친 기막힌 상황을 온몸으로 견뎌야 했다.

조선의 영의정으로서 당시 조'명'왜(朝'明'倭) 동북아 3국의 갈등을 고스란히 떠안고, 홀로 종묘사직과 백성, 그리고 강토를 지켜내야만 했다. 그리고 그는 만년에 고향으로 낙향, 하회마을에서 징비록을 썼다.

◆검무산 태극바위, 한반도의 중심

"경북도청 신청사 뒷산 검무산 정상 바위에 태극 문양이 있습니다. 신도청 앞 산태극 물태극을 이룬 하회마을 지세와 무관치 않습니다." 하회별신굿탈놀이보존회 부네탈 손상락(56) 학예사의 안내에 따라 검무산을 올랐다. 마치 북악산에서 청와대의 위용을 보는 듯 산 아래 마무리 단계에 들어간 도청 신청사의 위용이 대단하다. 우측 도교육청 청사도 우뚝 솟아 있다.

공사 중인 고층 아파트가 서로 경쟁이라도 하는 듯 층고를 높이고 있다. 코가 땅에 닿을 듯 가파른 산허리를 돌아 약 2시간쯤 지나자 정상이 보인다.

"여깁니다. 태극 문양이 또렷하지 않습니까?" 정상의 평평한 바위에 약간 푸르스름한 청색과 불그스름한 바위가 S자 모양으로 난 틈으로 나뉘어 있다. "저기 영양 일월산과 영천 보현산 자락이 낙동강 건너편으로 이어져 와 하회마을에서 휘돌아 맺히고, 뒤쪽에 있는 소백산과 학가산 정기는 바로 이 검무산으로 모인 형세라고 합니다."

부네탈 손 씨의 주장이 너무나 진지하다. 태극은 상반된 음과 양의 기운이 하나가 돼 조화로움을 이뤄낸다. 태극은 서로를 인정하는 상대적 가치가 바로 음양으로 나타난다. 태극은 분리될 수 없고, 둘이면서도 하나처럼 움직이며 완전한 균형을 추구하는 것이다.

하회마을의 산태극과 낙동강의 물태극, 그리고 검무산의 태극 바위는 이 지역이 한반도의 시작점이고 중심임을 말해 준다는 것이다. 그는 경북도청이 바로 이곳에 자리 잡은 자체가 대단히 의미심장한 일이라고 거듭 강조한다.

400년 전 하회마을은 위태롭기 그지없는 동북아의 중심에 있었다. 서애(西厓) 류성룡(1542~1607)은 임진왜란(1592~1598)을 일으킨 왜적과 조선에 출병해 점령군 행세를 하는 명나라 장수 이여송의 틈바구니에서 나라를 온전하게 보전하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당시도 왜는 '명을 치려 하니 길을 열어달라'(征明假道)는 구실로 반도를 유린하고, 명은 지원군을 보낸다는 핑계로 조선 분점이라는 음흉한 속내를 드러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나라 심유경에게 '조선의 8도 중 4도를 할양할 것'을 요구했다. 침략 2개월 만에 군왕인 선조가 의주로 파천하고 한양은 물론 평양성까지 함락되면서 무고한 백성들이 130만 명이나 목숨을 잃었다. 모두가 열세이고 극도로 혼란한 국내외 정세 속에서도 류성룡은 대동정신을 바탕으로 국난극복에 긴요하기 이를 데 없는 인재를 발굴해 낸다.

권두현(51) 경북미래문화재단 이사는 "임진왜란 당시 신분제도를 넘어서는 파격적인 인재등용의 근본은 태극사상이라고 봐야 한다"며 "대동단결을 의미하는 하회마을 태극사상과 마을 구성원 모두 다 평등하다는 하회탈춤 민주정신이 통합의 지도자로 일컫는 류성룡의 사상 밑바탕에 깃들어 있었다고 추정된다"고 했다.

◆탁월한 인재 등용으로 국난극복

임진왜란 전부터 류성룡은 평소 눈여겨보아 두었던 장수들을 파격적으로 등용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순신(1545~1598)이다. 어릴 적부터 같은 동네에서 함께 자라 누구보다 강직한 성품을 잘 알고 있는 데다 성품이 온유하고 지략이 뛰어나 능히 왜적을 물리치리라는 정확한 안목이 있었기 때문이다.

"변방의 말직으로 전전하다 정읍현감을 지내고 있던 이순신을 무려 7등급이나 승진시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전격 배치합니다. 왜란 발발 14개월 전이니까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이지요."

부네탈 손 씨는 사실상 전란 중 인사는 류성룡에 의해 이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란다. 반대파의 모함과 당리당략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순신을 끝까지 보호하고 이순신을 통해 왜란의 승기를 잡고 만신창이가 된 강토를 수습해 낸다.

실제로 이순신에게 안동 출신 무장을 선발, 수군만호로 천거한다. 그가 바로 선조 15년(1582년) 식년무과에 급제, 경남 고령현감을 지낸 권전(1549~1598)이다. 덕장에다 지장인 이순신의 전술전략이 제대로 먹혀들 수 있도록 용맹한 선봉장인 권전을 수족으로 앞세워 준 것.

문신이나 무신 못지않은 전장의 안목과 용인술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권전은 명종 때 판서를 지낸 마애(磨厓) 권예(1495~1549)의 장손이다.

"세계 해전사에 길이 빛나는 승전 기록을 남긴 명제독 이순신은 명제상 서애 대감의 탁월한 용인술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류왕근(61) 하회마을 보존회장은 류성룡의 합리적인 인재등용이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연전연승으로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원균의 참패로 조선 수군은 거북선과 판옥선을 거의 다 잃어 궤멸 직전의 위기에 처했지만 백의종군에서 복귀한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12척의 판옥선'으로 적선 133척을 격멸, 수장시킨 명량해전에 이어 노량해전에서도 500여 척을 격파하는 혁혁한 전공을 세운다. 이때 권전은 아장(亞將)으로, 장군선에 올라 전투를 벌이다 최후의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과 함께 장렬히 전사한다.

류성룡은 조선 육군의 수장으로는 나이 마흔여섯에 무과급제로 늦깎이 장수가 된 권율(1537~1599)을 파격적으로 발탁한다.

본관이 안동인 권율은 권전과는 1582년 식년무과 동기였다. 류성룡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행주산성 등 왜적과의 전투에서 연전연승을 거듭한다. 이순신의 참모로 활약한 권전의 동생인 권극, 권지도 권율이 이끄는 조선 육군에 편입돼 왜란에 참전한다.

문벌과 당파에 구애받지 않고 인재를 등용, 이순신과 권율이라는 위대한 영웅으로 전쟁을 독려한 류성룡. 그는 고향마을 앞 널찍한 풍산들을 중심으로 자리 잡은 안동지방 명문거족들도 대거 선발해 국난 극복의 선봉에 세우기도 했다.

◆징비록의 교훈 '역사는 반복된다'

"1598년 10월 명나라 제독 유정은 순천의 왜적 진영을 쳤고 통제사 이순신은 왜적을 바다 한가운데서 크게 패배시켰다. 그러나 그 해전에서 이순신은 전사하고야 말았다."

류성룡은 징비록(懲毖錄)에서 '참으로 비통하도다 이순신의 전사'라는 제목으로 그토록 아끼던 이순신의 사망을 비교적 담담하게 기록해 두고 있다.

국보 132호 징비록은 노량해전을 이렇게 전한다. '왜장 고니시 유키나카는 이순신과 명나라 장수 진린의 연합공세에 사천에 주둔하고 있던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그러나 이순신은 요시히로 선단을 공격, 왜 전선 500여 척을 불태웠다. 죽은 왜적은 수없이 많았다. 이순신은 도망치는 왜 전선을 남해까지 추격했다. 화살과 총알이 빗발치는 것을 무릅쓰고 직접 선두에서 지휘했다. 그러던 중 적탄이 이순신의 가슴께를 관통했다. 참모들이 부랴부랴 장막 안으로 옮겨 눕혔다. "지금은 싸움이 매우 급한 때다. 그러니 절대로 내가 죽었다는 것을 밝히지 마라." 이 말을 마치고 이순신은 이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류성룡은 그렇지만 1598년 '조선과 일본이 연합하여 명을 공격하려 한다'는 소문을 이유로 탄핵을 받고 관직을 삭탈당한다. 2년 뒤 근거 없는 모함임이 드러나 관직이 회복되고 조정은 그를 다시 찾았다. 하지만 그는 끝내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그리고는 고향 하회마을에서 난진이퇴(難進易退)와 청빈을 실천하며 1604년까지 징비록을 저술했다. 징비(懲毖)란 '내가 그 잘못을 뉘우치려 경계하고, 훗날의 환란이 없도록 삼가고 조심한다'는 뜻이다. 잘못된 역사의 반복을 막기 위한 경계의 기록이다.

그러나 징비록의 먹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조선은 병자호란(1636~1637)을 겪는다. 임진왜란 이후 38년 만에 군왕인 인조가 삼전도에서 나와 항복하고 청 태종에게 이마가 얼음에 부딪혀 피가 맺히도록 절을 하는 수모를 또 겪는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걸 잊은 결과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쳐 400여 년이 지난 이제야 참혹했던 임진왜란을 기억해내려는 것일까. 하회마을 사람들은 14일 첫 방영되는 드라마 '징비록'에 많은 관심을 보인다. 또한 태극바위 검무산 앞에 자리 잡은 웅도 경북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류성룡의 국난 극복 지혜와 호국충절의 정신을 더욱 승화시켜 나갈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신도청전략기획팀

권동순 기자 pinoky@msnet.co.kr

심용훈 객원기자 goodi6849@naver.com

사진작가 차종학 cym478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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