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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준의 대담] 유홍준 교수<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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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를 우리 삶 속에 못 끌어들이니 '우리 것'이 안된다"

유홍준 교수. 그의 글 한 줄, 말 한마디에 잊었던 역사가 살아나고,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문화가 우리의 일상 속으로 쑥 들어온다. 당연한 결과라 할까. 그의 는 300만 권 이상이 팔렸다. 인문학 서적으로서는 블록버스터 그 이상이다.

최근 출판된 일본 편도 마찬가지. 일본 아사히신문이 사회면 머리기사로 보도를 하고, 고급 독서문화의 상징인 이와나미쇼텐(岩波書店)이 일본어로 번역하여 출판했다. 우리나라와 일본 모두에서 큰 화제라는 이야기이다.

말과 글만 좋은 게 아니다. 배짱 좋은 행정가이기도 했다. 문화재청장 시절, 그는 그야말로 하고 싶은 대로 했다. 높은 전문성과 열정에 그 특유의 입담과 설득력까지 있었으니 대통령이든 누구든 그를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문화재 행정이 크게 좋아졌다.

대구와의 인연도 깊다. 1991년부터 약 10년간 영남대 교수로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와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 피카소룸에서 마주했다. 정상화 화백의 모노크롬(단색화) 작품과 대구 출신 윤병락 화백의 큰 사과 그림이 있는 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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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문화재

김병준: 영국 분들과 부여 집, 휴휴당(休休堂)에 갔던 기억이 난다. 요즘도 자주 가시나?

유홍준: 주말에는 거의 간다.

김병준: 어떻게 지방으로 갈 생각을 했나?

유홍준: 화천에 이외수, 논산에 박범신, 청도에 전유성 등 문화인들이 지방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좋은 일이다. 나도 언젠가 지방으로 간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노무현 대통령이 한마디 보탰다. "나도 당신도 지방으로 가자. 그래서 지방에 힘을 실어주자." 그러면서 날 보고는 섬 좋아하니까 어디 섬 하나 찾아서 가라는 거다. 속으로 '이 양반이 나를 어디 유배시킬 일 있나' 했다. 결국 부여에 집을 지었다.

김병준: 세월 지나면 그 집이 문화유산에 문화재가 되지 않겠나?

유홍준: 글쎄…. 어쨌든 집 이야기 하나 하자. 양동마을에 손동만가옥이 있다. 손동만이 누구냐? 등기부에 올라 있는 그 집 주인이다. 도대체 19대조 할아버지 때부터 내려와 문화재가 된 집에 지금 주인의 이름을 붙이는 법이 어디 있나. 왜 이러냐? 문화재를 물질로 봤기 때문이다. 그 속에 들어 있는 인문적 가치를 못 본 거다. 문화재청장 시절, 이런 것부터 바꾸라 했다. 그 집도 서백당(書百堂)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김병준: 그래도 우리는 이런 집을 문화재로 물려받았는데, 막상 우리는 뭘 물려주나? 모두들 아파트에서 살다 죽으니 누구 가옥이니 하는 것도 없고, 돈 있다고 좋은 집 함부로 지을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다.

유홍준: 회화, 공예, 조각 등은 예술가들이 알아서 할 수 있다. 김환기든 박수근이든 또 백남준이든 그 작품이 스스로 살아남아 국보나 보물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건축은 다르다. 그 시대 최고의 기술과 재력이 받쳐줘야 좋은 문화재가 된다. 집의 경우 이게 어렵다. 부자들이 문화재로 남을 만한 집을 지으면 호화주택이라 한다. 그 집이 언젠가 우리 모두의 것이 된다는 생각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게 없다.

김병준: 부의 축적 과정이 정당하지 못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게다가 상속세 등에 대한 신뢰도 낮고.

유홍준: 이제 상속세 등의 운영도 많이 좋아졌다. 상속세 3번 맞으면 마이너스가 되어 자연히 사회로 환원된다. 부자들이 돈을 쓰게 할 필요도 있다. 프랑스 루아르 강변의 저택들이나 미국 롱아일랜드의 별장들, 그리고 일본 가미자와에 있는 저택들을 봐라. 오늘날에 와서는 호텔 등의 공공시설로 쓰이고 있다.

김병준: 주택뿐만 아니라 일반 건축물에도 제한이 많다.

유홍준: 큰 공공건축을 할 때나 세종시 같은 도시를 건설할 때면 후대에 길이 남을 유산을 만든다는 생각을 해야 하는데 우리는 이게 약하다. 그냥 건설에 토목이다. 모든 게 입찰이어야 하고, 그것도 턴키 베이스라 대형 건설사만 참여할 수 있다. 좋은 건축가와 수의계약을 할 수도 없고, 좋은 기술이나 자재를 쓸 수도 없다.

김병준: 우리 문화재와 관련하여서도 그런 일화가 많을 것 같다.

유홍준: 경복궁 안에 건천궁이 있었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곳으로 일제가 들어와 제일 먼저 부쉈다. 문화재청장이 되어 이걸 복원하려 했다. 최고의 대목장에게 맡기고 춘양목 등 최고의 재료를 쓰려 했는데, 문제는 평당 비용이 2천200만원으로 나왔다. 당시 규정으로 한도가 1천500만원. 평당 700만원이나 차이가 났다.

김병준: 넘으면 감사받고 조사받고 야단이 난다. 그래서 어떻게 했나?

유홍준: 백년 천년을 가야 할 터인데 나중에 후손들이 뭐라 하면 그때 규정이 그래서 그랬다 할 거냐. 그래서 담당과장에게 그대로 하라고 했다. 그랬더니 담당과장 말이 청장이야 그만두면 되지만 몇 년간 감사에 시달릴 자기는 어쩌라는 거냐 했다. 어쩌겠나. 청장이 바로 사인할 테니 과장은 사인하지 말라고 했다. 상황이 이렇다.

▷삶 밖의 문화재

김병준: 조금 다른 이야기인데 결국 문화재라는 것이 많은 부분 큰돈과 큰 권력을 바탕으로 만들어진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가끔 민주적 가치나 형평의 논리와는 거리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유홍준: 그런 시각과 이론도 있다. 문화재를 볼 때도 그것이 가지고 있는 창조적 에너지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드는 과정에 동원되었던 노예나 민중의 고통 등을 보는 시각이다. 기본적으로 철학적인 문제이다.

김병준: 이 문제가 잘 풀리질 않으니 좋은 문화재 앞에서도 불편한 마음을 느끼곤 한다.

유홍준: 문화재나 문화유산은 개인의 권세와 부의 상징이라기보다 그 시대가 요구한 상징으로서의 의미가 있다. 즉 국가의 권위가 필요하니 이를 상징하는 건축물이 들어섰을 것이고, 종교가 필요하니 교회가 들어섰을 것이다. 그 시대의 기록으로 보면 된다.

김병준: 민중이나 일반 국민의 일상적 삶에 대한 기록은?

유: 그건 그것대로 민속의 형태 등으로 기록된다. 대구의 청라언덕 골목길 같은 것도 우리의 일상을 그대로 보존하자는 취지 아니겠나. 세계문명사를 쓴 웰스는 한 사람의 아테네 시민을 유지하기 위해 열 명의 노예가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같은 맥락의 이야기가 아닌가 한다.

김병준: 또 하나, 많은 문화재가 우리의 일상과 너무 단절되어 있다. 숭례문만 해도 그저 국보라 하니 국보인가 보다 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게 왜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는지도 모른다. 매일 보고 다니지만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도 주지 않는다.

유홍준: '우리 것'으로 보지 않고 네 것 내 것을 따지기 때문이다. 미국사람이나 영국사람은 박물관의 전시품을 보고 네 것 내 것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냥 '우리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내 게 아니라 생각한다. '나는 이런 것 하나도 없는데' 하는 거다. 여기서 끝이다. '우리 것'이라는 생각으로 가지 않는다. 당연히 관심도 애착도 적다.

김병준: 왜 이렇게 되었나?

유: 일단 박물관 미술관을 즐겁게 찾도록 해야 하는데 이게 잘 안 되고 있다. 선진국에선 미술관 박물관이 생활문화 속에 자리 잡고 있다. 특별전 같은 행사로 최소한 1년에 서너 번은 간다. 대구시민이 국립대구박물관, 대구미술관에 얼마나 다녀오나 생각해 봐라. 그리고 또 하나, 다른 나라는 문화재를 실제로 사용한다. 박물관으로 쓰기도 하고, 또 그 박물관에서 연회도 연다. 그런데 우리는 웬만하면 '들어가지 마시오'에 '촬영금지'다.

김병준: 유럽의 경우 실제로 박물관은 물론 정부의 사무실 등으로 쓰는 것을 많이 봤다.

유홍준: 문화재청장 시절, 경회루를 검사대회 연회장소로 사용하게 했다가 세게 얻어맞았다. 하지만 끝까지 고집을 했다. 그 덕에 지금도 시간제한을 두고 80명까지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있다. 문화재를 이렇게 우리의 삶 속으로 끌어들여야 한다는 생각이 부족하다. 그러니 '우리 것'이 안 되는 것이다.

▷유홍준의 성공과 대구

김병준: 이 점에 대해 정말 많을 일을 하신 것 같다. 문화재를 우리의 삶 속으로 끌어오는 일도 그렇지만, 그 이전에 로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우리의 삶과 연결시켜 주었다.

유홍준: 사실 는 예상치 않은 성공이었다. 애초의 의도는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미술인들에게 우리 문화와 미술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알리겠다는 것이었다. 다분히 전문가들을 향한 미술사 중심의 책이었다. 그런데 일반 대중이 기다렸다는 듯이 이 책을 찾았다. 그야말로 폭발적 성공이었다.

김병준: 그만큼 읽기 좋게, 잘 썼다는 이야기 아니겠나.

유홍준: 여러 가지가 맞아떨어졌다. 1993년이라 마이카 바람이 불 때였다. 피서지 등만 찾을 것이 아니라 의미 있는 곳을 찾아가 보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또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이데올로기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한 단계를 넘은 분위기였다. 그런데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이런 걸 다 따져가며 책을 썼다면 성공할 수 있었을까? 아마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쓰고 싶은 대로 쓴 것이 그렇게 되었다.

김병준: 단지 그것만이 이유이겠나.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책의 내용과 스타일이다. 는 대중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다.

유홍준: 대학 때 민주화운동으로 7년 형을 받았다. 형집행정지로 일찍 출감했지만 어쨌든 대학은 14년 만에 졸업했다. 그 후 근 10년 미술평론가로 활동했는데, 사실상 백수였다. 그런데 이 백수 생활이 전문적 지식을 대중과 교감하게 만든 것 같다. 단적으로 학술적으로 받은 프로젝트였다면 그런 글이 되었겠나. 오히려 부실하다는 핀잔을 들었을 것이다.

김병준: 교수들이 학문이라는 이름 아래 대중성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 오늘과 같이 대중의 역할이 큰 상황에 있어 작지 않은 문제이다.

유홍준: 교수 업적 평가부터 그렇다. 나의 는 교수평가 때 논문 한 편보다 점수가 낮다. 그래서 젊은 교수들이 이런 대중화 작업에 뛰어들지 못하고 있다. 이런 것이 인문학의 위기를 초래한 면이 없지 않다.

김병준: 영남대 교수 경력 등 대구와의 인연이 만만치 않다.

유홍준: 앞서 말한 대로 백수로 전전하다 1991년 영남대 교수가 되었다. 자격이 부족한 사람을 채용해 준 것이 너무 고마워 이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더욱 열심히 책을 썼다. 2002년 명지대가 내 제안을 받아들여 전국 처음으로 학부에 미술사학과를 창설했고, 나도 미술사학의 발전을 위해 영남대를 떠났다. 그래도 내 인생의 황금기는 대구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대구서 성공한 덕에 나를 대구사람으로 기억하는 사람들도 많다. 늘 그리워한다.

김병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사는 것 같아 부럽다.

유홍준: 후배들에게 말하고 싶다. 좋아하는 것을 해라. 1967년에 미학과에 입학했는데, 그때 미술사나 미학이 블루오션이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앞으로도 뭐가 어떻게 될지 누가 알겠나. 좋아하는 것을 해라.

김병준: 감사하다. 이 대담은 1부와 2부로 나누어 진행된다. 다음 주 월요일 2부를 게재하겠다.

사진 이성근 객원기자 loke@naver.com

[김병준의 대담] '문화유산답사기'의 유홍준 음성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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