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진중권의 새론새평] 미안하다, 베트남

1963년 서울생. 서울대 미학과.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 철학과 박사 수료. 중앙대 겸임교수. 카이스트 겸직교수
1963년 서울생. 서울대 미학과.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 철학과 박사 수료. 중앙대 겸임교수. 카이스트 겸직교수

파월 장병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

베트남 곳곳 60여개 한국군 증오비

부끄러운 과거 참회한 독일처럼

피해자 손 잡고 진정한 사과할 때

재작년에 TV 방송 촬영을 위해 베트남을 방문했을 때의 얘기다. 한국어를 하는 베트남 가이드에게 별생각 없이 "작은아버지 두 분이 베트남전에 참전하셨다"고 말했다. 순간 가이드가 얼굴을 찡그린다. "나쁜 일 많이 하셨겠네요." 예상하지 못한 이 적대적 반응에 민망하고 당황스러웠다. 그제야 베트남의 이곳저곳에 60여 개에 달하는 한국군 증오비가 세워져 있다는 사실이 머리에 떠올랐다.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 사건의 피해자 두 명이 우리나라를 방문했다. 이와 관련하여 조계종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던 베트남전 사진전 리셉션은 매우 유감스럽게도 베트남 관련 단체들의 항의로 취소되었다. 이들 단체에서는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역사 왜곡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나는 이들의 주장을 믿지 않는다. 몇 사람의 손바닥으로 가리기에는 민간인 학살의 증거가 하늘만큼이나 넓기 때문이다.

한국군의 학살을 인정한 미군의 공식 조사가 있고, 희생당한 민간인들의 시체와 사진이 있고, 가까스로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증언이 있고, 학살에 가담한 병사들의 뒤늦은 참회와 고백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증거가 더 필요한가? 게다가 이 불행한 사태에 대해서 대한민국의 두 대통령이 이미 베트남 정부에 공식적으로 사과를 했다. 타조처럼 저 혼자 모래에 머리를 파묻는다고 있었던 사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학살도 나쁘지만, 그보다 더 나쁜 것은 학살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다. 어느 민족이든 역사적 과오를 범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과오를 부정하는 것은 미래에도 똑같은 범죄를 다시 저지르겠다고 다짐하는 것과 같다. 일본 정부는 종군위안부의 존재나 남경대학살의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주변국에 이런 일본 정부의 태도는 앞으로도 유사한 상황에서는 같은 짓을 하겠다는 결의의 도발적 표명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과거사와 관련하여 우리는 종종 역사를 철저히 청산한 독일을 거론하며 과거사의 굴레를 벗지 못한 일본을 비난하곤 한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에 대해 우리는 독일이 되어야 하나, 아니면 일본이 되어야 하나? 대답은 분명하다. 우리는 미개한 일본이 아니라, 성숙한 독일의 길을 따라야 한다. 아니, 그러기로 약속했다. 독일을 칭찬하고 일본을 비난하는 것 자체가 과거사를 처리하는 우리의 원칙 천명이기 때문이다.

과거에 베트남 참전용사들이 군복을 입고 민간인 학살을 보도한 어느 언론사에 난입하여 마구 기물을 부수던 폭력적인 장면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군복 입고 집단의 위력을 과시한다고 그들의 주장에 설득력이 더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 난동을 보면서 내게는 외려 이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평시에 자국에서도 저렇게 폭력적이니, 전시에 외국에서는 오죽했을까?' 이런 추악함은 더 이상 반복되어서도, 허용되어서도 안 된다.

베트남전 관련 단체들도 이제는 '명예'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가져야 한다. 수백만 명을 학살한 독일이 오늘날 수십만 명을 학살한 일본보다 국제적으로 더 두터운 신뢰를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과거사를 처리하는 그 철저한 방식 때문이다. 만약 독일이 일본처럼 있었던 사실조차 막무가내로 잡아떼며 참회와 사과를 거부했다면, 오늘날과 같은 국제적 신망을 누릴 수 있겠는가? 진정한 의미의 명예란 바로 그런 것이다.

베트남 전쟁은 복잡한 의미를 갖는 전쟁이다. 우리에게 그것은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는 전쟁이었지만, 베트남인들에게는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는 민족해방전쟁이었다. 그 전쟁은 이 두 개의 정당한 대의가 서로 충돌한 불행한 전쟁이었다. 각자 자기의 대의를 위해 그 전쟁에 참여한 양측의 용감한 병사들에게 명예를 부여할 때가 됐다. 하지만 그 명예가 참된 것이 되려면, 참전용사들이 방문한 두 피해자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해야 한다. "미안하다, 베트남."

동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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