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를 부리는 사냥은 삼국시대부터 이어져 온 우리 전통 민속이다. 고려시대에 매 사육을 담당하는 관청인 '응방'(鷹坊)을 설치할 만큼 각 계층에서 매 사냥이 성행했다. 그런데 가축과 달리 매는 귀했고 야생의 매를 사냥 매로 키우는 일도 힘들었다. '잘 길들인 해동청(海東靑'푸른 빛깔의 큰 송골매) 한 마리 열 마지기 옥답과도 바꾸지 않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수알치'나 '봉받이'로 불린 매 주인 입장에서 매를 잃어버리거나 도둑맞을 경우 손해가 크다. 이 때문에 매의 꽁지깃 아래 '시치미'와 함께 작은 쇠방울을 다는데 방울 소리로 매의 위치를 확인했다. 시치미는 얇게 깎은 뼛조각에 매 주인의 이름을 새긴 인식표다. 시치미가 없으면 누구의 매인지 구별하기 힘들어서다. 매의 시치미를 떼어버리고 슬쩍 가로챈다는 의미의 '시치미를 뗀다'의 어원이다. 국어사전에 '알고도 모른 체하거나 하고도 하지 않은 척한다'고 뜻풀이 했다.
20일 일본 중의원에서 아베 총리와 야당 대표들 간 '당수 토론'이 벌어졌다. 시이 가즈오 공산당 대표가 "아시아에서 벌인 침략전쟁이 잘못된 전쟁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는가"라고 묻자 아베 총리는 "전쟁의 참화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말로 교묘히 둘러댔다. 그러자 시이 대표는 일본의 침략을 처벌하기 위해 연합국이 전쟁을 시작했다고 명기한 '포츠담 선언'을 상기시키며 선언을 인정하는지 거듭 물었으나 아베는 계속 엉뚱한 답변으로 얼버무렸다.
국제포럼 참석차 방한 중인 무라야먀 전 총리가 "면전에서 나를 매국노라고 비난하지만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부정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거듭 반성의 뜻을 밝힌 것에 비하면 아베의 시치미 떼기는 달인의 경지다. 얼마 전 세계 석학들과 역사학자 187명이 잘못된 과거사를 인정할 것을 일본 정부에 촉구하며 집단성명을 냈다. 여기에 동참한 저명 역사학자가 벌써 500명 선을 넘어섰다. '역사학연구회' 등 16개 일본 역사연구 단체도 곧 성명을 내고 일본의 과거사 인식에 대한 견해를 밝힌다는 입장이다.
시치미를 떼고 모른 체하거나 아닌 척한다고 진실을 덮을 수는 없다. 전후 일본이 아무리 국제사회에 이바지하고 아베 총리의 구호대로 '우츠쿠시이 니폰'(아름다운 일본)을 부르짖어도 '역사의 시치미'를 속일 수는 없다. 우기면 매를 손에 넣을 것처럼 보이지만 가려진 시치미는 곧 백일하에 드러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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