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乙의 대표 직업' 아파트 경비원의 수모·애환

아버지의 시말서/ 이응수 지음/ 새움 펴냄

"몸은 경비원으로 살아도 마음은 하늘을 날아야지."

이응수 작가의 이 작품은 아파트 경비원의 애환을 담은 이 시대 아버지들의 서글픈 자화상이자 우리의 민얼굴을 바라보게 만든다.

을(乙)의 대표적 직업이자 '실패한 월급쟁이들의 종착역'이라 불리는 아파트 경비원. 전직 대학교수, 대기업 임원, 교장 선생님, 중소기업 CEO 등 그들의 과거 이력들은 놀랍고도 다양하다. 그들은 왜 아파트 주민들의 잔소리와 심부름, 멸시와 무시를 묵묵히 참고 견디며 현장을 지키고 있을까?

아파트 경비원, 그들은 힘들게 오늘을 살아가는 한 가정의 가장인 아버지의 대명사로, 본의든 아니든 이 나라 여명기에 태어나서 한 시대의 아픔을 지탱해 온 생활전선의 주인공들이다. 그들 대부분은 유엔이 정한 '노인'들이며, 우리나라에서는 '어르신'으로 호칭되는 인생 경력자들이다. 인생유전의 포물선을 넘어 이젠 황혼길에 들어선 사람들, 그들은 저마다 파란만장한 장편소설감 하나씩 가지고 살면서도, 오늘은 말을 아낀다.

"그건 아버지 생각이고요. 우리 생각은 안 그래요. 제발 우리 하는 대로 가만히 계세요. 그래야 집이, 우리가 편안합니다."

여기에 한 아버지가 있다. 중고등학교, 군대생활, 이삿짐센터 노동자…. 이제 아파트 경비원에 이르기까지, 제복에 갇힌 64세 3년 차 아파트 경비원 오종환 씨의 영혼은 하루도 편할 날이 없다. 그 어떤 제복이, 아들 딸을 둔 아버지로서 마음 졸이며 살 수밖에 없는 그의 불안감을 가릴 수 있을까. IMF 이후 실직에다가 하늘같이 믿고 의지했던 아들의 돌연한 죽음, 자식 회사의 배려로 구내매점에서 일하고 있는 외며느리, 그 후 유복자로 태어나 어느새 여섯 살이 된 손녀, 옹고집으로 소박데기가 돼 돌아온 딸. 얼마 전부터 그런 집안환경이 원인이 돼 생긴 아내의 치매…. 오늘도 고단한 삶 속에서 그는 아버지의 무게를 견딘다. 거울 속의 초라한 자신에게 말을 건넨다.

"이 사람아, 그래도 사는 날까진 우리 열심히 한번 살아보는 거야."

이런 오 씨에게 또 다른 고민이 생겼다. 아파트 단지 내 실력자인 부녀회 강 회장과 주차문제로 다툰 것이다. 그녀는 내년 초부터 주민 직선제로 동대표회의 의장을 뽑는데 ○순위로 오른 인물이다. 그래서 항상 불안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오 씨는 아파트 관리소장에게 불려가 무조건 강 회장에게 사과하라는 주문을 강요받는다. 하지만 그로선 잘못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사과할 생각이 없다.

"당신네들이 그따위로 처신을 하니까 환갑, 진갑 다 지내도록 발버둥을 쳐도 경비원 노릇밖에 못 하는 거야."

강 회장 입에서 나온 이 말은 곱씹을수록 분하고 괘씸하다. 경비원, 아니 이 나라 나이 든 노동자 전체에 대한 모욕이다. 그런 인간적인 수모에다 사과까지 한다는 건 체질이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주민, 특히 차기 동대표회의 의장 ○순위 실력자와 경비원이라는 주종관계가 만든 '학대'라는 걸 생각하면서 고민은 더 깊어진다.

어느 비번 날, 관리소장은 또 전화를 걸어 오 씨의 처신을 질책하며 강 회장에서 사과를 강요한다. 관리소장 또한 연말 선거를 앞두고 살아남기 위한 생존전략이었다. 평소 가까이 지내던 경비반장 고 씨에게 심경을 털어놓았다, "절이 미우면 중이 나가야 하는데, 중이 못 나가니 도리가 없는 거 아니우. 고만 저쪽 원하는 대로 오 씨가 먼저 한번 만나보지 그래." 힘이 정의는 아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정의의 노릇도 하게 된다는 투의, 고 반장 이야기에 오 씨는 자신을 열심히 위로하며 술을 마신다. 고 반장도 교직에 몸담고 있다가 유학 간 자식의 학비에 시달려, 퇴직금으로 이를 막기 위해 학교를 그만둔 뒤 어쩌다가 경비원이 된 사연을 갖고 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경비원 오 씨는 강 회장이 사는 104동 아파트 화단에서 새벽에 쓰레기를 수거하러 온 환경미화원에 의해 시체로 발견된다. 그날 밤 오 씨에게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저자는 "글을 쓸 때 연민이며 동정, 분노 같은 건 피해야 그 글이 제대로 산다. 나는 이 글을 쓰는 동안 그들과 티격태격하느라고 애를 먹었다. 행간마다 그들이 끼어들어 괴롭혔기 때문이다. 외람되게도 이 글을 30만 경비원에게 바친다"고 했다.

경북 성주 출생인 저자는 공무원과 KT 대구본부 홍보실장을 지냈으며,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각 당선, 에 단편소설, 에 수필 추천, 논픽션 5회, 논픽션 2회 당선되었다. 저서로 문화비평집 '꼴값' '영부인은 직위가 아닙니다', 에세이 '이것만은 남기고 가야지' '지나간 것은 다 그리움이다', 장편소설 '갓바위에 뜨는 달', 논픽션 '아파트 경비원' 등이 있다. 335쪽, 1만3천원.

석민 기자 sukmi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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