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진중권의 새論새評] '배신'의 정치학

1963년 서울생. 서울대 미학과.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 철학과 박사 수료. 중앙대 겸임교수. 카이스트 겸직교수
1963년 서울생. 서울대 미학과.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 철학과 박사 수료. 중앙대 겸임교수. 카이스트 겸직교수

이성·평화적 문제 해결이'정치' 참뜻

'시혜와 보은' '배신과 복수'는 봉건적

서청원·이인제·김태호 해바라기 자세

유권자 '신뢰' 저버릴 때 진짜 '배신'

미국의 대통령이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부르며 미국의 모든 시민들에게 감동적인 통합의 메시지를 날리고 있을 때, 한국의 대통령은 '배신', '볼모', '심판' 등 듣기 민망한 극단적 표현까지 써가며 국회를 공격하고 나섰다. 말이 국회이지, 실은 유승민 원내대표에 대한 이지메를 촉구한 셈이다.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 대구의 유권자들은 이 외침에 플래카드로 응답했다. "박근혜 대통령 배신자, 유승민은 사퇴하라!"

인상적인 것은 '배신'이라는 낱말. 이 낱말에는 사적 원한이 담겨 있다. 충성을 맹세했던 이들이 아버지 서거 후 차갑게 돌아서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을 법도 하다. 문제는 그 사적 원한이 아예 그의 정치철학이 되었다는 데에 있다. 현대적 의미에서 '정치'란 문제의 이성적 해결, 갈등의 평화적 해결, 이해의 합리적 조정 등을 의미한다. '시혜와 보은', '배신과 복수' 따위로 하는 정치는 근현대가 아니라 봉건시대에 속하는 것이다.

물론 현대정치에서도 '배신'이라는 말이 유의미하게 쓰이는 맥락이 있다. 가령 정치인이 자기 자신과 유권자에게 했던 약속을 지키지 않을 때, 우리는 그가 배신을 했다고, 다시 말해 자신의 신념과 유권자의 신뢰를 저버렸다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유승민 원내대표는 그 누구에게도 '배신'을 하지 않았다. 그저 유권자들을 속이지 않기 위해 "증세 없는 복지는 불가능하다"고 솔직히 말했다가, 계속 눈 가리고 아웅 하려는 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렸을 뿐이다.

내가 보기에 정작 배신자들은 따로 있다. 먼저 서청원 최고위원. 작년 전당대회 때만 해도 이분은 "당과 청와대의 관계를 '수평적 긴장관계'로 재정립해야 한다"고 외쳤다. 그리고 '수평적 긴장관계'란 "당이 사회적 이슈를 주도하고 청와대와 정부는 정책으로 구체화하는 분업구조를 형성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말했다.

그랬던 분이 청와대의 한 마디에 화들짝 놀라 연일 "대승적 결단이 필요하다"며 유승민 원내대표의 사퇴를 요구하고 있다.

이어서 이인제 최고위원. 이분 역시 작년 전당대회 때만 해도 아직 정신이 멀쩡하셨다. "행정부에 끌려다니는 정당이 아니라 모든 정치적 이슈를 선점하고 풀어내는 능동적이고 역동적인 정책정당으로 탈바꿈해야 한다." 이렇게 호기 있게 외치셨던 그분이 지금은 행정부에 질질 끌려다니며 푸른 기와집 보스의 한 마디에 원내대표에 대한 정치적 청부살인에 나서셨다. 이게 그가 불사조가 된 비결일까?

마지막으로 김태호 최고위원. 그 역시 그 자리에서 이렇게 외쳤다. "지금 우리 새누리당의 모습은 어떤가? 입은 닫고, 귀는 막고, 눈은 위만 바라보고 있는 해바라기 정당이다. 집권 여당이 청와대의 눈치만 봐서는 안 된다. 청와대 출장소로 비치는 정당은 공당의 모습이 아니다."

이랬던 분이 지금은 청와대 출장 업무로 분주하시다. 이들뿐인가? 지금 새누리당은 밭이다. 해바라기 꽃밭이다. 그 많은 꽃이 각하를 따라 일제히 고개를 돌리는 장관을 보라.

하지만 배신은 이들만 한 게 아니다. 그 동네에서 가장 심각한 배신을 한 것은 실은 박근혜 대통령이다.

그는 야당 시절 지금 자신이 거부권을 행사한 국회법 개정안과 거의 동일한 법안에 여러 차례 서명했었다. 정작 집권을 하고 나니 생각이 180도로 달라진 것이다. 지금 그는 국회가 정부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성토하나, 그런 상황을 만들어낸 '국회선진화법안'은 2012년 자신이 주도하여 통과시킨 것이다.

이율배반의 압권은 그다음이다. 이회창 씨가 새누리당의 총재를 하던 시절, 그는 "제왕적 총재는 제왕적 대통령으로 갈 수밖에 없다. 한나라당은 1인 지배 정당을 종식해야 한다는 국민적 여망을 저버렸다"며 심지어 한나라당을 탈당하기까지 했다.

그랬던 그가 청와대에서 제왕적 대통령 노릇 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공당의 대표를 제치고 스스로 제왕적 총재까지 겸하려 든다. 얼마나 기막힌 일인가. 이거야말로 진정으로 유권자의 '심판'을 받아야 할 '배신'이 아닐까?

동양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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