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와 함께 성큼 다가온 휴가철
올해는 고향으로 떠나는 게 어떨까
부모님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편안한 시간으로 보내면 좋겠다
새벽녘 촉촉한 빗줄기가 대지를 적시는 소리에 잠을 깨면 듣는, 쇠죽솥에 불 때는 할아버지의 쿨럭이는 기침 소리, 어머니의 삐걱거리는 물지게 소리, 벌써 한바탕 들일을 하고 들어오시는 아버지의 소 모는 소리. 동틀 무렵 들려오는 소리들에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면, 세수도 안 하고 작은 도랑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전날 물속에 묻었던 어레미(구멍이 제일 큰 체)를 들어 올리면 피라미들이 가득 담겨 퍼덕였다.
황금빛 나락이 익어가는 논두렁은 아버지 심부름에 깜장고무신을 신고 찌그러진 주전자를 들고 내달리던 길이다. 동네 탁주집에서 주전자 가득 탁주를 받아 행여나 쏟아질까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기던 그 길. 과자 대신 입술을 온통 주황색으로 물들이며 오디를 따먹던 뽕밭도, 짙은 어둠 속에서 서리를 하다 호랑이 할배의 고함소리에 놀라 줄행랑을 치던 고구마밭도 기억난다. 모두 까까머리 어린 시절의 기억이다.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는 청운의 꿈을 품고 나 홀로 대구로 '유학'을 떠났다. 그때는 머리가 좀 컸다고, 클래식 음악에 푹 빠졌더랬다. 틈만 나면 찾아갔던 구 대구극장 자리에 있던 음악감상실 구석진 자리는 고된 수험생활에 지친 나의 피난처이자 쉼터였다. 가게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수천 장의 클래식 LP 중 듣고 싶은 음반을 고르며 보내는 시간은 설렘의 시간이었다. 가끔은 찌뿌드드한 몸을 달랠 겸 팔공산을 오르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등산로가 조성되어 있지 않아 산길이 험해 산을 오르기가 꽤 힘들었다. 그렇게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정상에 오르면 발아래 펼쳐지는 풍경이 너무 좋았었다. 그래서 주말이면 하숙집 아주머니한테 부탁한 도시락 하나를 달랑 들고 팔공산으로 향했다. 정상에 올라 맞은 시원한 바람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시원하고 상쾌했었다.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내가 좋아하는 정지용 시인의 '향수'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고향에 대한 애틋함과 절절함을 담담하게 담아낸 이 아름다운 문장처럼, 어릴 적 고향에서의 추억들은 어느새 예순이 훌쩍 넘은 내게 아직도 늘 아름답고 정겨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은행장 시절, 거래처 방문을 위해 전국 곳곳을 돌아다닐 기회가 많았다. 그러다 우연히 어린 시절의 추억이 깃든 곳을 지나기라도 하면 빡빡한 일정에 곤두섰던 마음이 나도 모르게 푸근해졌다. 고향, 세상의 그 어떤 곳이 이렇게 포근하고 정겨울까. 연어가 자신이 태어난 곳을 기억하고 그 먼 대양에서 모천으로 회귀하듯, 고향은 언제나 망각할 수 없는 어머니의 품과 같다. 세상에서 비켜서거나 돌아앉거나 내려놓을 때 고향만 한 곳이 또 있을까.
무더위와 함께 휴가철이 성큼 다가왔다. 매년 그랬듯이, 언제나 이맘때쯤이면 풍경 좋은 나라들의 여행 코스를 정리한 가이드 책자가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것은 낯설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올해는 예년과 다르게 국내여행에 관한 뉴스가 매스컴의 주요 기사로 등장하고 있고, 언론을 비롯한 각 사회단체들이 내수 진작 및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여름휴가 국내여행 가기' 캠페인에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정부기관 역시 공공기관이 운영하고 있는 시설을 휴가 및 체험활동 시설로 활용하며 국내 여행을 적극 장려하고 있다. 필자 역시 오랜 기간 금융계에 몸담았던 사람으로서 국내 경기 활성화를 바라는 마음에 이번 캠페인이 매우 반가웠다. 그리고 더 나아가 올해는 고향으로 휴가를 한 번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지역경제에 미약하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 그리고 내 어린 시절 추억이 한껏 담겨 있는 우리 고향을 다시 만나고 싶은 바람에서다. 고향은 언제나 우리 마음을 풍요롭고 넉넉하게 만들어주는 선물 같은 곳이니까.
'쉴 휴(休)' '겨를 가(暇)', 휴가의 의미를 '하던 일을 멈추고 자신에게 여유를 선물한다'로 해석해 보면 어떨까. 이번 휴가는 추억이 살아 숨 쉬는 노을 비낀 고향집 뒷마루에 앉아 부모님과 함께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편안한 시간으로 보내면 좋겠다. 그래서 지난 동안 쌓인 걱정과 근심을 잊는 '비움'의 시간과 더불어, 고향에 대한 추억과 가족의 사랑을 다시 생각하는 '채움'의 시간이 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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