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목요일의 생각] 나이가 든다는 것

언젠가 흰머리가 희끗희끗하게 올라오던 분이 동성로의 한 재즈바에서 고(故)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나지막이 부른 일이 있다. 나도 모르게 따라 흥얼거리자 그는 내게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이가 들면 이 노래의 참맛을 알게 될 거야"라고 말했다. 그날 나는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나이를 먹으면서 전에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하나씩 공감하고 있다. 어려서는 받아쓰기 100점을 받지 못하거나 구구단을 외우지 못하는 급우가 이해되지 않았다.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수학, 과학을 어려워하는 나 자신을 보며 어린 시절 급우들을 이해하게 됐다. 하나를 이해한 대신 다른 하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의 나는 병역 기피자가 이해되지 않았지만, 내 입대일이 가까워 올수록 그들이 왜 그랬는지 알 것 같았다. 20대 초반, "담배는 끊어도 술은 못 끊겠다"던 직장인이 된 대학 선배들의 말. 당시에는 '쓰디쓴 소주가 뭐 그리 좋을까?'라고 여겼지만 내가 그 나이가 됐을 무렵 나도 소주 맛을 알아버렸다. 20대 중'후반에는 허우대 멀쩡하고 직장도 번듯한 대학 선배들이 노총각이 된 게 신기했다. 올 들어 나는 '이렇게 노총각이 되는구나!'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내가 요즘 깨우친 게 하나 있다. 바로 부모님을 이해하는 것이다. 머리가 조금 굵어지면서 아버지가 그렇게 한심해 보일 수가 없었다. 낡을 대로 낡은 구두, 아들이 입던 재킷을 고쳐 입으시던 모습, 쉰밥도 버리기 아까워하시던 게 궁색해 보이기 짝이 없었다. 어머니는 매일 새벽기도를 다녀와서는 "내가 너 잘되게 해달라는 기도 말고는 기도할 게 뭐 있겠느냐"고 했다. 신실한 종교인 혹은 구도자가 아니라 복을 빌러 다니는 듯한 그 속물근성이 싫었다. 어머니는 내가 어릴 때부터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가야 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대학생이 된 아들에게 어머니는 적성에 맞는 진로 선택을 함께 고민하기보다는 줄곧 "학점 관리는 잘하고 있느냐?" "착실하게 스펙 쌓고 있느냐?"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하지만 내가 싫어했던 그 모든 게 당신들의 사랑이었다.

우리는 간혹 나잇값 하기 어렵다는 말을 하곤 한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나잇값 한다는 건 '얼마나 타자를 공감할 수 있느냐'가 관건인 것 같다. 누구나 어른이 된다. 반면에 누구나 진짜 어른이 되는 건 아니다. 그리고 진짜가 되는 건 어렵다. 몸만 자란 어른아이가 아닌, 심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도 성숙한 참어른이 되고자 한다면, 이런 고민의 첫발을 내디뎠다면 잠깐의 여유를 갖고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도 한 방법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의 시선에서 현상을 바라본다면 이해하지 못할 일도, 분노할 일도 줄어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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