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장의 사진이 있다. 사진 속 남자는 일본 전통복 차림으로 의자에 걸터앉아 있고, 여자는 그 남자에게 비스듬히 기대앉아 책을 읽고 있다. 남자는 오른손으로 턱을 괴고 나른한 표정으로 허공을 보며, 여자의 가슴 위에 왼손을 걸쳐놓고 있다. 사진 속의 두 남녀는 한없이 편안하고 자유로운 모습이며, 그 분위기는 사뭇 관능적이다.
놀랍게도 이 사진이 촬영된 곳은 1925년 5월 일본 도쿄의 한 형무소 조사실이었다. 사진의 주인공은 일본 천황과 황태자 암살 혐의로 조사받고 있던 조선인 박열과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대역죄를 저질렀으므로 사형 판결은 당연하던 상황이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초월할 정도로 자유롭고 대범했던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성향이 이 한 장의 사진 속에서 절묘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 사진을 찍은 지 15개월 후인 1926년 7월 23일 가네코 후미코는 일본 우쓰노미야 형무소에서 자살로 삶을 마감한다. 사형판결 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우쓰노미야 형무소로 옮겨진 지 2주 만이었다. 더위가 한창이던 그때 그녀의 나이 스물네 살이었다. 무기징역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삶의 희망은 남아 있을 때였다.
24년, 길지 않았던 가네코 후미코 삶의 대부분은 고통스럽고 외로웠다. 버팀목이 되어주지 못한 무책임한 부모 탓에 힘든 성장기를 보냈으며 아나키즘을 공유한 조선인 혁명가 박열을 만나 열정적 사랑에 빠지지만, 그 사랑은 오히려 그녀를 죽음으로 이끌었다. 가네코 후미코는 이 고통스러운 삶의 기억을 수감 중에 계속 적었고, 사상적 동지 구리하라 가즈오(栗原一男)가 그 원고를 모아서 사후에 책으로 출판하였다. 그 책이 바로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1931)이다.
이 책에 조선체험에 관한 부분이 있다. 가네코 후미코는 1912년부터 1919년까지 7년 동안 충청북도 부용에서 일본인 이주자인 삼촌 가족과 더불어 살면서 조선인들의 비참한 삶을 직접 목격했으며, 3'1 만세운동을 경험하였다. 책 속의 내용은 그 시기의 기억을 적은 것이다. 이 기간은 그녀 인생에서 가장 가혹한 시기로 기록되고 있다. 우연히 만난 근처의 조선인이 늘 굶주려 있던 그녀에게 한 끼의 식사를 대접했고 가네코 후미코는 10여 년 뒤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도 이 따뜻한 기억을 되살려 내어 적고 있다. 학대받고 소외된 삶을 살았던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는 일본의 폭압에 시달리던 식민지 조선의 상황에 대해 연민과 더불어 동일시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그녀가 조선의 독립을 지지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박열은 가네코 후미코가 죽은 뒤에도 거의 반세기를 더 살았다. 혼자 살아남은 신산한 세월 동안 그는 조선이 독립하는 것을 보았고, 일본 천황이 실권을 잃고 상징적 존재로 물러나는 것도 보았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들이 목숨을 걸고 실현하고자 했던 세상, "인간이 인간이라는 단 하나의 자격에 따라 모든 권리와 평등을 향수할 수 있는 세상"은 여전히 실현되지 않았다. 22년의 긴 수감 세월을 끝낸 박열에게는 그런 이상을 실현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던 듯하다. 박열이 죽고 다시 반세기가 흘렀고 이제 그들의 신념과 사랑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점점 더 희미해져 가고 있다.
정혜영 일본 게이오대 방문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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